기울어진 운동장, 두산 사태와 금투세: 1화
2024.08.16 06:00
수정 : 2024.08.16 06:00기사원문
2021년 3월 11일, 당시 사회부 법조기자로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재판에 들어갔다. '삼성물산 제일모직의 부당합병 의혹' 형사 재판의 '공판준비기일'이었다. 공판준비기일이란 공판에 들어가기 전 향후 공판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검찰과 변호인이 쟁점사항과 증거조사방법 등을 논의하는 자리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공판준비기일임에도 11명의 검사와 20명 이상의 호화 변호인단이 참석했다. 검찰 측이 먼저 2시간 가량의 혐의 사실을 PPT를 통해 발표했다. 검찰 측의 주장은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승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위법하게 진행됐다"는 거였다. 삼성그룹이 2012년 12월 '프로젝트 G'라는 문건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및 조작 △국민연금 의결권 확보를 위한 불법 로비 등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삼성물산 주주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전자 지분을 물려 받으면 막대한 상속세로 인해 지분이 줄고 이로 인해 경영권이 악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 부회장의 승계에 유리하도록 제일모직 주가는 고평가되고, 삼성물산 주가는 저평가 됐을 때 합병을 추진했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다. 당시 합병비율은 모직과 물산이 1대 0.35였는데 삼성물산의 낮은 합병비율로 이 부회장은 큰 이익을 보고, 다른 투자자들은 잠재적으로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제일모직을 고평가하는 방식은 당시 제일모직이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미래 성장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검찰의 공소사실(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사실) 발표 후 변호인단의 발표가 이어졌다. 변호인단은 검찰의 공소사실 대부분을 부인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듣는 동안에는 명백한 범죄로 보였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변호인단의 변론을 통해 검찰의 공소사실이 법적 논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반박되어졌다.
변호인단은 제일모직의 주가가 고평가 됐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제일모직 주가가 상승한 것은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바이오산업 가치 등이 반영됐기 때문이다”며 “특히 현재(2021년 3월 기준) 삼성바이오로직스 시가총액이 50조 원인데, 제일 모직이 가진 지분가치만 해도 20조 원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합병당시였던 2015년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주가를 봐야한다는 논리로 반박될 수 있다.)
변호인단은 이어 "제일모직 주가가 고평가 됐다면 합병 발표 전에 국민연금이 제일모직 주식을 총 4600억원 순매수하지 않고 매도 했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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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진행된 2015년은 경제 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2년째로 당시 언론을 비롯한 사회적 분위기를 나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 합병 반대 의사를 제출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1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해 주요 주주들에게 합병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법원은 2015년 7월 엘리엇의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 당시 한 증권사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냈다. 한화투자증권은 2015년 7월 8일 삼성물산에 불리한 합병조건이라는 내용의 리포트를 발간했다. 당시 22개 국내 증권사 중 유일했다. 주진형 당시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해당 리포트 발간 이후 그룹 고위층의 사퇴 압력이 있었다고 여러차례 공개 발언했다.
이 재판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1심 재판부는 지난 2월 이 회장의 19개 혐의를 전부 무죄 판결했다.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으로 2심 결론은 내년 1월쯤 나올 전망이다.
개인적인 전망으로는 2심의 결론과 대법원의 최종 판결 역시 1심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만에 하나 불법적인 일이 있었다해도 이를 증명하기 쉽지 않다. 만에 하나 불법이 증명이 된다 해도 해당 판결이 초래할 사회적 비용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리엇과 같은 당시 삼성물산 주주들이 유죄 판결을 근거로 국제 소송 등을 걸 경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초래될 수 있다. 미우나 고우나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국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업이다. 파운드리, AI 등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삼성전자가 법적 리스크에 잡혀 있다간 훨씬 더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 더불어 삼성전자는 국내 언론 미디어 업계에서 가장 큰 광고를 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2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법조기자를 했지만 재판은 '사실과 진실'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논리와 증거'의 싸움에 더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악인이 사람을 죽였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그는 무죄가 된다. 기업사냥꾼이 교묘한 술책으로 수백명이 전재산을 잃고 그 중 몇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할지라도 해당 술책이 법전에 적힌 유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처벌받지 않는다.
또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떤 피고인은 실형을 사는 반면 어떤 피고인은 무죄가 되기도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처럼 어떤 재판의 결과는 '논리와 증거'의 싸움조차 되지 못한다. '전관예우(법원 행정관청 등의 고위공직자가 퇴임 후 선배로서 예우해 주는 것)'에 따라 고위직 판사나 검사가 퇴임하고 변호사로 개업해 맞는 첫 사건의 승소율은 이상하게 높다. 재판이 '돈과 인맥'의 싸움으로 변질될 때 사법정의는 실종되고 사회는 부폐한다.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 합병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두산그룹의 합병 소식은 어쩌면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보다 더 나쁜 합병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우리나라 자본시장 법률과 제도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합병이기 때문이다. 향후에 재판을 받을 리스크도 없다. 하지만 두산 그룹이 추진 중인데로 합병이 진행될 경우 수많은 개미 투자자가 손해를 볼 것은 자명하다.
두산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은 알짜 기업인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에서 인적 분할 해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하는 게 골자다. 두산은 지난해 1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낸 밥캣과 만년 적자기업인 로보틱스의 합병비율을 1대 0.63으로 정했다. 밥캣 1주의 가치는 로보틱스 0.63주에 불과한 것이다.
삼성의 예를 들자면 로보틱스는 '제일모직(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 보유)'과 흡사하고 밥캣은 '삼성물산'과 비슷하다. 로보틱스의 주가는 과대 산정됐고, 밥캣의 주가는 과소 산정된 것이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합병과정에서 큰 손실을 봤던 것처럼 합병 비율에 따라 두산밥캣 주주들의 손실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밥캣 외국인 기관투자가인 션 브라운 테톤캐피털 이사는 “두 회사의 합병은 날강도 짓”이라며 “두산그룹 대주주에게만 유리한 불공정한 합병”이라고 성토했다. 엘리엇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두산이 원하는데로 합병이 진행될 경우 로보틱스 지분 68%를 가진 지주회사 두산은 밥캣에 대한 지배력을 현재 13.8%에서 42%까지 올릴 수 있다. '합병 마술'을 통해 캐시 카우인 두산 밥캣의 지분을 3배 가까이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금융감독 당국이 이를 곱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해당 합병을 두고 “두산그룹 구조 개편과 관련한 증권신고서에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 제한 없이 지속해서 정정 요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서류 심사 과정에서 허들을 두고 합병 승인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보겠다는 것이다.
(계속)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