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시대정신

      2024.08.25 19:29   수정 : 2024.08.25 19:46기사원문
역사 속에서 대학은 시대정신을 포효해 왔다. 11세기 이후 문을 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 유럽 중세대학은 지성주의를 통한 인간과 공동체의 재발견을 주도했다. 하버드, 예일과 같은 17세기 미국 초기 대학은 청교도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근대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대표했다.

19세기에 시작한 유럽과 미국 대학들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주의라는 근대 정신의 도도한 흐름을 이끌어 갔다. 대학 지성들은 새로운 정치·법·경제 질서를 토론하고 제안했고, 과학정신에 기반한 산업사회의 기술적 토대를 이끌어 갔다. 대학 자체가 사회의 리더였고, 또한 사회 각 분야의 리더를 키워내는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등 근대 대학의 출현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대학의 지성이 암울했던 시절 국가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고, 각 분야의 인재를 양성했다.
1953년 일인당 국민소득 67달러였던 최빈국 대한민국이 지난 70년 동안 500배 성장을 일궈내 3만5000달러 시대를 열게 된 원동력이 바로 인재였고, 이들을 키워낸 곳이 대학이었다. 자유와 평등 정신의 산실이 되어 민주적 헌정질서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도 대학이었다. 이렇듯 대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어느 한 시대도 설명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대학이 이 사회의 시대정신을 이끌어 갈 힘을 잃고, 또한 그럴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 시대를 기대하기 힘들다. 대학이 졸업 후 취업과 연봉협상 조건인 졸업장과 성적표의 공급자 정도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다면 문제다. 대학이 개인 학생의 '성공'을 위한 도약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대학의 궁극적 존립 목적은 아니다. 학생 성공의 열쇠를 시장에 맡기는 굴욕적 협상을 하는 것은 문제다. 대학의 역할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대학은 학생이 졸업 후 현업 각 영역에서 성공함과 아울러 인생을 통한 개인적·사회적 '성취'를 이루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시대 대학이 제시해야 하는 시대정신은 '미래를 향한 상상력'이다. 교과서와 백과사전 지식을 주입하는 대학 교육은 이제 효용을 다 했다. 우리가 지금 겪는 팬데믹, 기후위기, 에너지위기, 이념과 경제 양극화, 초저출생과 초고령화, 국제분쟁 등은 모두 인류 역사상 초유의 경험들이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실제적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어느 하나의 대학 학제가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대학의 학제·전공 사이의 칸막이를 거두어야 하고, 나아가 분야 간 급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문제해결을 위한 다학제적 접근을 넘어서 탈학제적(anti-disciplinary) 접근이 강조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대학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기 위한 선결요건은 자유와 자율의 정신이다. 이를 위해 현실적으로 가장 절실한 것이 재정 문제다. 궁핍한 대학에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24년 우리 정부의 교육예산은 약 95조8000억원인데, 이 중 대학에 투입되는 고등교육 예산은 약 15%인 14조5000억원 정도다. 이 중 전체 대학의 4분의 3인 사립대학에 대한 경상예산 지원은 제로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기준 우리 고등교육 1인당 교육비 1만1287달러는 OECD 평균의 64%로,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 국가 중 최하위다. 16년째 동결된 등록금은 대학이 앞길을 막는 또 하나의 높은 장벽이다.
대학 등록금이 영어유치원 교육비 월 200만원의 절반도 되지 못하는 수준으로 일률 규제되는 국가에서 우리가 대학에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재정구조를 갖추기 위한 대학의 자구 노력도 중요하다. 인류가 처음 겪는 복잡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열린 상상력의 실험장을 구축하고, 그 성과로 인류 미래에 기여하고 나아가 이를 산학협력, 기부문화로 연계해야 한다.
대학이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국가와 사회, 나아가 인류 미래의 시대정신 선도의 담대한 소명을 다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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