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로 물든 미술관… 동서양 어우러진 전시 이색적

      2024.08.30 04:00   수정 : 2024.08.30 04:00기사원문
파스텔 고유의 일시성과 연약함을 인간, 문명, 자연의 지속과 소멸의 사유로 확장시킨 대규모 전시가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파스텔화의 마법사'로 불리는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44·사진)의 작품 세계 전반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Dust)'라는 타이틀로 내년 1월 19일까지 계속된다.

파스텔의 몽환적 느낌으로 인간과 자연의 변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번 전시는 구작 회화 및 조각 48점과 함께 신작 회화 20점, 미술관 벽에 그린 파스텔 벽화 5점 등을 리움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선보인다.



니콜라스 파티는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미술사의 다양한 작가와 모티브, 양식, 재료 등을 참조하고 샘플링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온 작가다. 특히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이후 잊힌 파스텔화로 풍경과 정물, 초상 같은 전통적인 회화 장르를 재해석해 이름을 알렸다.

파티는 이번 전시를 위해 리움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을 참조했다. 초상 신작 8점은 조선시대 '십장생도 10곡병'과 김홍도의 '군선도' 속 상징들을 따와 상상 속 여덟 신선(팔선)을 형상화한 것이다.

우선, 호암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동굴' 그림 앞에는 조선시대 '백자 태호'가 놓였고, '공룡' 연작은 청동운룡문 운판에 재현된 용(龍)의 이미지와 만난다.
또 '주름'과 '곤충' 연작은 겸재 정선의 '노백도'와 함께 전시되는 등 고미술품과 파티의 그림이 전시장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대형 벽화를 선보여온 파티는 이번에도 호암미술관 로비와 전시장 벽 위에 파스텔 벽화를 그렸다. 로비의 중앙계단 벽면에는 '폭포'가 그려졌고 전시장에도 '동굴'과 '나무 기둥', '산', '구름' 벽화가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에서 이목을 끄는 2점의 거대한 '폭포'는 중력의 힘에 대한 상기이며, 자연의 무한한 순환을 상징한다. 전시장 1층에 자리한 '십장생도 10곡병'에서도 장수를 상징하는 물이 폭포의 형태로 흐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 속 폭포를 둘러싼 울룩불룩한 바위들은 증식하는 산의 내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치 천을 덮어쓴 소품처럼 부자연스러워 인공으로 만들어낸 자연처럼 보인다.

파스텔의 해학을 잘 보여주는 '주름’과 ‘곤충’은 주름지고, 구불거리는 형체가 마치 신체의 일부 같기도 하고 초현실적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티는 역동적인 신체의 이미지와 시체를 연상시키는 벌레, 변화와 부활의 상징인 나비를 한데 놓아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림을 완성했다.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인 ‘동굴’은 파티 회화의 주된 모티프로, 자신만의 동굴 풍경을 창조했다. 깊고 거대한 동굴을 벽화로 그리고 그 앞에 ‘백자 태호’를 배치한 것이다. 태호(왕손의 탯줄을 보관하던 항아리)는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태(胎)를 중시하던 우리의 오랜 전통을 반영한다.

이밖에 전시 작품의 백미인 김홍도의 ‘군선도’(1776) 옆에는 나체의 인물이 뒤돌아 서있는 파티의 작품 3점이 걸려있다. 이 작품들은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 ‘죽음의 천사’ 초연 기념 만찬을 위해 파티가 제작한 연작이다.

오페라의 원작인 루이스 브뉘엘의 1962년 동명 영화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랜 시간 연회장에 갇힌 사람들이 점점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고 갈등과 죽음을 겪는 이야기다.

파티는 만찬 장소의 네 벽에 뒷모습 초상 12점을 걸고 손님들을 벽을 향해 앉혔다.
만찬은 원작 영화에서처럼 긴 시간 이어졌고, 손님들은 나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멈춰버린 시간 안에 갇혀 어딘가를 바라보는 세 인물의 모습은 옆에 걸린 김홍도의 ‘군선도’ 속 영생의 시간을 얻은 신선들의 행렬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파티는 파스텔화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확장하며 미술사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롭게 참조하고 샘플링하는 작가"라며 "미로 같은 공간에서 아치형 문을 통과할 때마다 만나는 낯선 무대에서 동서고금의 문화적 상징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교차하며 우리의 상상을 자극할 것"이라고 말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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