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희 번역가가 전하는 톨스토이 '부활'

      2024.10.17 18:12   수정 : 2024.10.17 18:12기사원문

'톺아보다'는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내책 톺아보기'는 신간 도서의 역·저자가 자신의 책을 직접 소개하는 코너다.

어느 날 톨스토이는 법률가이자 작가인 코니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석한 귀족 남성이 절도죄로 피고석에 선 매춘부가 예전에 자신이 유혹하고 버린 여인임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인의 불행에 책임을 느껴 그녀와 결혼할 결심을 하고 정성껏 옥바라지하지만 그녀가 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코니에게 그 소재로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지만 2년이 넘어도 별 진척이 없자 그의 허락을 받아 1889년부터 직접 창작을 시도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10년 전,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을 막 마친 톨스토이는 자살 충동에 시달릴 만큼 깊은 우울을 겪으며 더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강압적이고 무능한 전제 정치, 땅을 잃고 기아로 내몰린 절대다수의 농민,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도시 노동자와 빈민들… 그런 러시아에서 귀족이자 작가로 산다는 사실이 그를 헤어날 길 없는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몰고 간 듯하다. 그 후 그는 좀 더 선명한 호소력을 지닌 에세이와 민중 교육을 위한 민담을 쓰고 실질적인 구제 활동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광인 취급을 받을 만큼 예술과 소설을 폄하하며 실천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는 5년도 못 돼 보르헤스가 최고의 단편소설이라고 일컬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기 시작했고, 10년 후에는 새 장편소설을 위한 구상에 빠져들었다. 장차 '부활'이라고 이름 붙여질 이 소설은 11년에 걸쳐 쓰였으며, 그가 쓴 원고의 양은 '전쟁과 평화'를 위한 원고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그가 이 소설의 완결과 출간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 분파인 두호보르교도들의 캐나다 이주를 위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였다. 채식을 주장하고 국가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정교회를 비판하고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던 신자들이 정부의 학살과 투옥과 고문으로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1881년 이후의 저술에 대해 인세를 받지 않기로 한 결정을 깨고 이 책의 인세로 그들의 이주를 도왔다.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인 '부활'은 결국 소설에서 도망치지 못한 채 미(美)와 선(善) 사이에서 몸부림치던 말년의 작가가 끝없는 고쳐 쓰기를 통해 찾아낸 ‘소설의 길’이자 ‘예술적 유언’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얼개는 코니의 이야기와 같다. 배심원이 된 지주 귀족 네흘류도프는 무신경한 법조인들과 모순투성이의 재판 제도로 억울하게 살인죄 판결을 받은 매춘부 카츄샤를 보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 사랑스럽던 시골 아가씨가 매춘부로 전락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된 것이 자신의 무책임한 동물적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카츄샤와 결혼해 그녀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으로 속죄하리라 결심한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지옥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를 지나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멸망당할 족속으로.”
카츄샤를 통과하면서, 즉 카츄샤를 면회하고 그녀의 석방을 위해 애쓰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 동행하게 되면서 네흘류도프는 신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지옥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든 사람들이 가장 소박한 연민의 감정조차 스며들지 않을 만큼 둔감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애가 스며들지 않았던 거지. 포장된 땅에 비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제 그의 앞에는 카츄샤와의 결혼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이런 지옥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가 놓여 있다.

러시아 문학자 에이헨바움은 톨스토이가 모든 것을 ‘낯설게 하기’를 통해 바꾸어버린다고 말한다. 모든 기성 체계에 대해 ‘아니야, 진실은 따로 있어’라고 집요하게 외치며 모든 수준에서 ‘낯설게 하기’를 밀어붙이기에 그가 구사하는 모든 기법에는 폭로하고 파괴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그 어느 작품보다 이 ‘낯설게 하기’의 파괴력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안타깝지만 필자가 독자를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소설을 소설이 아닌 말로 계속 전하기가 두렵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와 결혼하고 참된 인간으로 거듭났을까. 카츄샤는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새로운 인생을 찾았을까. 톨스토이는 자신의 마지막 장편소설을 통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냈을까. 이제는 독자의 시간이다.

연진희 번역가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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