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2024.10.23 18:30
수정 : 2024.10.23 18:35기사원문
그간 세계 반도체산업에서 삼성과 인텔은 혁신의 아이콘이었지만 AI 시대에 들어서는 제대로 된 혁신이 없었다. 혁신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제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첨단산업에서는 우직한 긴 시간의 연구개발과 가죽을 벗기는, '혁신(革新)의 아픔' 없이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높아지지 않는다.
ASML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첨단 노광장비 독점기업이지만 첨단 극자외선(EUV) 장비 하나를 개발하는 데 10여년간 우직한 연구개발을 한다. 인텔처럼 재무성과에 목매 단기성과에만 집중하다 보면 반드시 후유증이 생긴다.
강에 봄이 왔는지는 강에서 노는 오리가 가장 먼저 안다. 경영진의 오판으로 봄을 겨울로 오인하면 인재가 떠난다. 직원들의 이직과 기술유출이 있다는 것은 비전보다는 비관이 조직에 팽배해졌다는 얘기이고, 사기가 꺾였다는 것이다.
조기 출근하고 주말근무 다시 시작하는 경영으로는 기세가 꺾인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 어렵다. 판을 엎는 획기적 발상은 쥐어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용인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파격의 보상에서 나온다.
투명성이 있어야 시장의 신뢰를 얻고 기업의 자가발전이 아니라 시장의 신랄한 비판을 통해서만 진짜 반성이 가능하다. 잘나가는 TSMC와 주가가 추락한 한국 대표 반도체기업의 분기보고서를 비교해 보면 한국은 두루뭉술하게 퉁 쳐서 반도체 매출 얼마로 표기해 D램에서, 낸드에서, 파운드리에서 얼마를 벌었는지 모른다. 서로 묻어가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다.
TSMC의 분기보고서는 반도체 공정기술별, 수요제품별, 국가별 매출액이 상세히 나오고 심지어 월별 매출액까지 공시한다. 어떤 기술과 제품이, 어떤 시장에서 문제인지를 시장이 투명하게 알게 한다. 시장은 불확실성이 있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다른 기업은 다 공개하는데 기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숨기는 게 많으면 글로벌 투자가는 투명한 기업도 많은데 굳이 이런 기업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하는 세상에는 승부에 큰 변화가 있다. 3차 산업혁명 시대까지는 금·은·동메달이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는 1등이 다 먹는, 승자독식 'WTA(Winner Takes All)' 시대로 진입했다.
4차 산업혁명은 2등 하면 죽는다.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이미 이런 조짐이 보였지만 AI 시대로 진입하면서 세상은 이젠 확실히 'WTA'가 대세다. 30~40년간 잘나가던 기업도 한눈팔다 보면 한 방에 훅 가는 세상이다. 세상을 주름잡았던 소니, 노키아, GE, 인텔, 폭스바겐이 좋은 사례다.
불황에 거상 나고 난세에 영웅 난다.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에서 늘 있는 일"이다(一勝一敗 兵家常事). 30년 구력 가진 세계 1위 반도체기업이 한 번 실수했다고 그간 축적된 '1등 DNA'가 바로 사라질 수는 절대 없다.
대불황을 거치면서 잠들어 버린 '1등 DNA'를 다시 깨우기만 하면 영웅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만약 조직 내에 인재가 없다면 전 세계로 인재를 찾아 나서고, 경쟁사를 뛰어넘는 기술개발을 한 직원에게는 최고경영자(CEO) 연봉을 뛰어넘는 파격의 보상을 내걸어야 조직의 분발을 다시 이끌어 낼 수 있다.
한국 대표기업의 주가하락은 '2등 하면 죽는 시대'에 2등으로 추락한 것에 대한 시장의 엄중한 경고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변하는 주가에 별 감동 없는 글자로 용서 구할 생각 말고 피나는 노력과 우직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만들어진, '숫자로 된 실적'을 보여주는 것이 정답이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