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기업병 치유 가능한가

      2024.11.12 18:14   수정 : 2024.11.12 18:15기사원문
삼성전자의 추락에 끝이 안 보인다. 10만원을 넘보던 삼성전자 주가는 5만원대로 가라앉아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몇 달 전만 해도 AI반도체 호황에 올라타 신성장동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 삼성전자가 지금은 인텔의 뒤를 밟아 도태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난무한다.

국가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위기를 시발로 대기업병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삼성전자와 같은 1등 기업을 중환자로 만드는 고질병으로 '조직의 관료화'가 꼽힌다.
구체적으로 1위 지위 안주, 기존의 성공방식 고수, 변화에 대한 거부, 선구적 리더십 실종, 단기실적 중시, 부서 이기주의, 소통과 협업의 부재, 폐쇄적 기업문화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이런 대기업병은 한국 대기업에만 고유한 병이 아니다.

1등 기업이 앓는 관료적 경직화는 보편적 대기업병이다. 기업이 병에 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노쇠하면 병에 걸려 사망하듯이 기업의 성장주기에서도 '생로병사'가 발생한다. 대기업이 병에 걸려 쇠퇴해야 기업생태계에 선순환이 이뤄진다. 만일 1등 기업이 병에 걸리지 않고 불로장생하면 산업이 쇠퇴하고 경제가 질식한다.

한 기업이 건강한 것과 생태계가 건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업생태계가 가장 활발한 미국의 경우 과거에 시장을 주름잡던 GM, GE, 인텔, US스틸 등 레거시 기업이 쇠락하고 그 대신 그 자리를 테슬라, 엔비디아, 메타, 구글 등 테크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같던 노키아가 사라졌지만 거기서 파생된 수많은 벤처기업이 핀란드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대기업병이 삼성전자뿐 아니라 한국의 기업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강력한 전염력을 가진 한국형 K기업병에 감염이 안된 선도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통 대기업뿐 아니라 신생 대기업도 K기업병에 걸려 건강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카카오, 네이버, 쿠팡, 배달의민족 등은 벤처기업 특유의 유연성과 혁신성을 상실하고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데만 주력한다.

한국 기업 전반에 걸쳐 확산된 한국적 K기업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기업 외적인 한국 고유의 경영여건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전문가도 있다. 엄격한 노동정책, 과도한 규제, 반기업 정서 등이 기업을 옥죄고 병들게 만든다고 한다. 최근 노동·환경·안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부패, 공무원의 무능, 인종갈등 등이 만연한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업환경은 양호한 편이다. 6·25전쟁을 겪고 경제개발을 시작하던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당시에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1세대 기업인들은 맨손으로 오늘날의 대기업을 일구어냈다. 기업이 어려워진 문제를 외부환경에서 찾으면 답이 안 나온다.

결국 한국적 K기업병은 한국 기업의 특유한 속성에 기인한다. 총수 중심의 전근대적 지배구조, 순혈주의의 폐쇄적 경영진, 공채 기수의 수직적 문화, 연공서열의 획일적 인사제도, 미흡한 성과보상 동기, 순환보직에 따른 전문성 결여 등이 모든 한국 기업의 공통된 병폐이다. 특히 도전과 모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이 쇠퇴한 것이 가장 심각한 병이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기업인과 관리자들은 리스크를 회피하고 안전경영을 추구한다.
요즘 대기업 임금단체협상에 '승진거부권'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가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승진해 임원이 되면 보상은 적고 책임만 크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가 팽배한데 무엇을 새롭게 시도하고 혁신할 수 있겠는가. 기업의 구조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환골탈태의 처방이 있어야 K기업병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前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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