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담양, 기다림과 정성으로 빚은 한국의 장(醬)을 찾아서
2024.11.21 08:53
수정 : 2024.11.21 10:27기사원문
【담양(전남)·순창(전북)=정순민 기자】종묘제례악, 판소리, 씨름, 강릉단오제, 남사당놀이, 강강술래, 택견, 농악, 아리랑, 김장. 지금까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은 모두 22개로, 이제 23번째 등재를 코앞에 두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먹었다는 한국의 장(醬)과 장 담그기 문화다.
최종 등재 여부는 내달 2일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판가름 나지만 사실상 등재됐다고 봐도 틀림없다.
장 담그기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앞두고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한식진흥원과 코레일관광개발이 발 빠르게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여행상품을 내놨다. 농식품부에 의해 장 벨트로 지정된 전남 담양과 전북 순창의 식품명인을 만나보고 직접 장 담그기 체험도 해보는 프로그램이다.
■간장 만들기 체험 "시간과 정성이 팔 할"
"재료로는 물과 메주, 소금을 쓰고 여기에 시간과 정성이 들어갑니다. 이중에서 어느 하나만 소홀해도 (장이) 안됩니다. 장 담그기의 팔 할은 정성입니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고려전통식품에서 만난 기순도 명인(75)은 장 만들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전통식품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35호이자 370년 전통의 비법을 지켜온 기 명인이 살림을 꾸려가는 곳으로, 농식품부가 'K-미식벨트' 사업 일환으로 지정한 '장 벨트 스폿'의 하나다.
장흥고씨 문중 10대 종부이기도 한 기 명인은 여기서 간장, 고추장, 된장 등 270여종의 장을 전통 방식으로 만들고 있는데, 지난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이곳 씨간장으로 요리한 양념갈비가 청와대 만찬에 올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마당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장독들이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마당 한가운데 항아리 1000여개가 줄을 맞춰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여기에는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넘게 숙성된 간장이 담겨 있다. 이제 막 만들어진 맑은 장을 '청장', 5년 미만의 간장을 '중간장', 5년 이상 묵은 검은색의 간장을 '진장'이라고 한다.
기 명인이 그중 한 뚜껑을 열자 간장 냄새가 금세 마당 전체에 퍼졌다. 9년 전인 지난 2015년 기 명인이 손수 담근 진장이다. "이런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해 간단하게 김밥을 만들어줘도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고 기 명인은 말했다.
고려전통식품에선 이밖에도 깔때기와 체를 이용해 간장이 될 장물과 된장이 될 건더기(메줏덩이)를 나누는 '장 가르기' 체험을 해볼 수 있고, 직접 만든 간장 300㎖와 된장 450g 1개를 가져갈 수 있다. 또 간장을 활용한 요리 체험으로 된장국(4인1조)을 만들어 먹어볼 수도 있다.
담양에 왔다면 죽녹원,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 인근의 관광 명소들도 둘러볼 일이다. 죽녹원에선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로 이뤄진 대나무 숲길을 쉬엄쉬엄 걸어볼 수 있고,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선 인생샷을 남길 수 있다. 또 관방천을 따라 수령 300~400년 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관방제림에선 떠나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고추장도 만들고 관광명소도 둘러보고
이번에는 한국인의 '맵부심'을 자극하는 고추장 만들기 체험에 나설 차례다. 한식진흥원과 코레일관광개발이 마련한 'K-미식벨트' 프로그램이 안내하는 다음 장소는 장류의 본고장인 전북 순창에 있는 순창장본가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4호이자 순창고추장의 산증인인 강순옥 명인(78)이다.
여기선 최근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에 나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고추장 버터'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고추장 버터는 버터 30g에 고추장과 꿀, 쪽파, 말린 마늘 조각 등을 취향에 맞게 넣어 느끼한 맛은 줄이고 달콤한 맛은 추가한 퓨전 K소스로, 빵에 발라 먹거나 파스타 등 각종 요리의 재료로 쓸 수 있다.
이밖에도 순창장본가에선 강순옥 명인과 함께 순창고추장 만들기 체험을 직접 해볼 수 있고, 강 명인이 만든 다양한 고추장을 맛보는 시간도 따로 마련돼 있다. 또 간장 만들기 체험에서처럼 직접 만든 순창고추장 100g은 예쁜 병에 담아갈 수 있다.
'K-미식벨트' 프로그램에는 순창고추장 만들기 체험 외에도 순창고추장의 근본이 되는 깨끗한 물과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강천산 트레킹과 강천힐링스파 탐방, 장맛을 좋게 하는 옹기 만들기 체험 등도 포함돼 있다.
전국 최초의 군립공원이기도 한 강천산(剛泉山)은 골짜기마다 단단한 암반 위로 깨끗하고 맑은 물이 샘처럼 솟아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순창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는 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순창고추장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11월의 강천산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그만이다.
또 순창옹기체험관에서 진행되는 '나만의 옹기 만들기 체험'은 물레를 직접 돌려 그릇을 만드는 과정을 온전히 느껴보는 것 외에도 옹기가 한국의 장맛을 어떻게 더 좋게 하는지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여기서 직접 만든 나만의 옹기는 나중에 택배로 배달해주기 때문에 내가 만든 장류를 담아두거나 영구히 소장할 수 있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