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4대 古都' 전북 익산의 역사와 지리
2024.12.09 09:41
수정 : 2024.12.09 11:34기사원문
전북 익산(益山)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여산은 그 입구다. 현재 익산은 행정구역으로 익산시이며 과거 오랫동안 익산은 익산군과 이리시로 분리돼 있었다. 1906년 익산군, 1931년 이리읍, 1949년 이리시, 그리고 1995년 통합으로 익산시가 되었다.
전북은 지형적으로 동쪽의 소백산지(무주·진안·장수), 서쪽의 호남평야(전주·이리·군산), 그리고 그 중간에 중산간지(임실·순창·남원)로 이루어진다. 익산은 금강 북쪽의 논산평야와 익산 남쪽의 호남평야와 연결된다. 익산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장항선) 등의 철도가 교차하는 호남 최대의 교통요지가 되었다. 익산의 지리적 위치, 지정학적 장소성의 영향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불교, 근현대의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의 터전으로서 종교도시로서의 익산의 단면을 본다. 익산은 고대사에서 백제 이전의 마한과 청동기, 석기시대 문화유적도 다수 보유한다.
호남의 입구 여산은 특히 현대시조의 거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으로 유명하다. 이병기 선생은 학교 교육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면서 전북의 여러 초중등 학교와 전국의 유수의 학교들 교가를 작사했다. 경남중, 경기중, 경복중, 경북중 등 당시 전국 명문들도 포함된다. 가람문학관에는 가람선생이 작사한 모든 교가를 다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문학관의 한국 학교 교육에 대한 큰 기여를 보여준다.
전북 익산시는 1995년 행정개편으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돼 이루어졌다. 고조선시대에는 건마국(乾馬國)이었고, 위만(衛滿)에 쫓긴 기자(箕子)의 준왕(準王)이 익산으로 내려오면서 마한국(馬韓國)이 됐다. 현재의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시대에는 금마저(金馬渚)라 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금마군으로 바뀌었다. 1344년 고려시대 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황후 친정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높여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익산으로 변경됐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수도 사비와 버금가는 특별수도로 여겼음을 뜻한다. 왕궁 터와 미륵사지 터, 많은 산성들이 그 의미를 더한다. 백제 무왕의 새로운 통치 이념을 위한 철저한 계획 왕도(王都)로 개발했다고 본다. 백제가 더 존속했다면 아마도 수도를 익산 금마로 이전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도 왕도로 손색없는 많은 시설과 유물이 나오고 있어 백제와 마한의 역사를 살펴준다.
역사적으로 마한과 백제, 부여로 연결되며 고려의 역사유적도 더러 살필 수 있다. 마한은 진한(경북), 변한(경남)과 함께 삼한으로 불린다. 마한은 기원전에서 대략 기원후 400년까지 경기, 충청, 전라도에 존속한 정치체제였다. 익산은 역대 왕조에서 수도가 된 일이 없는 곳임에도 한국의 4대 고도(古都)로 공식 인정되었다. 4대 고도는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익산이다. 고도는 과거의 왕궁, 왕성, 왕릉, 왕사(王寺)가 있는 도읍이다. 익산은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륵사와 왕궁 유적, 쌍릉 등이 있다. 4대 고도의 보존과 육성을 위해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입법예고되고 2020년 5월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에 힘입어 익산에도 ‘국립익산박물관’이 설립됐다.
지형 및 지질에 있어 익산은 화강암 지대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강암으로 1억5000만년전 중생대 쥬라기, 백악기 정도의 질이 좋고 아름다운 화강암이다. 현재 채석되고 있는 한국의 화강암 생산에서 가장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 황등면에 국내 최대 화강암 채석장이 있고 암석의 질도 매우 높다. 익산의 발전은 자연 및 인문지리의 연관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산지의 지역 특성에 대한 영향, 호남평야의 개간과 수리시설, 저수지 시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근대적 개발과 현재의 상황 등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가 잘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도로, 하천, 해안 교통과 근현대의 철도와 신작로 건설 등이 익산의 역사지리와 현재의 익산 지리에 반영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익산, 여산, 함열, 용안 등이 통합돼 현재의 익산이 됐다. 일제강점기 솜리 마을에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잇는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익산의 중심은 금마에서 솜리로 옮겨졌다. 솜리(혹은 솝리)는 ‘깊은 속 마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그대로 한자어 이리(裡里)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이(裡)는 한자 표리(表裏)에서 속을 뜻하는 이(裏)와 같은 뜻이다. 이리라는 지명은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서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솜리가 철도 요지가 되고, 이를 배경으로 금마에 있던 익산 행정 중심을 솜리로 옮기면서 1931년 전격적으로 익산을 한자 지명 이리로 바꾼 것이다. 이리시가 다시 익산시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에는 이리초, 이리중, 이리고, 이리공고 등 이리 명칭 학교들이 많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됐다가 현재는 익산시로 변경됐다. 여전히 익산의 경제와 행정중심지는 과거 이리에 있다. 주요 문화유적은 청동기 문화와 초기 철기 문화 유적과 함께 마한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가 모두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마한과 백제 유적이 대표적이다.
익산은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의 지맥이 경계가 되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 군산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부여군과 논산시, 동쪽으로는 완주군, 남쪽으로는 김제시와 전주시, 서쪽으로는 군산시와 행정 경계를 이룬다. 호남평야 상으로 보면 평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경제개발에 따른 대규모 평야 개척은 익산에서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는 당시 익산 농업의 큰 힘이었다.
익산역은 철도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의 교차역으로서 지역의 다양한 농업 물산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 사실 평야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논산평야, 익산평야, 호남평야, 나주평야가 연결돼 있다. 익산은 지형, 물산, 장소와 위치, 역사와 문화 등에서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