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이 남긴 묵시록

      2024.12.09 18:17   수정 : 2024.12.09 18:17기사원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다. 한 도시에 갑자기 원인 모를 '백색 실명'이 전염병처럼 퍼진다. 정부가 감염자들을 격리한 정신병원에선 식량 부족과 폭력 등 비인간적 상황이 벌어진다.

격리소 밖 도시 역시 실명 전염병으로 아비규환으로 전락한다. 유일하게 시력을 가진 의사의 아내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악전고투하던 중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시력이 회복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사라마구는 실명 전염병이 종식된 4년 후를 다룬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후속작을 냈다. 한 수도에서 선거가 치러지는데 투표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70% 이상의 유권자가 어느 후보도 선택하지 않는 백지투표를 했다.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한 정부가 재투표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작은 인간의 탐욕과 연대의 중요성을, 후속작은 시민들의 깨어남과 사회적 변화를 담았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이 작품의 핵심 기제인 '실명'은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현대사회에서 '눈먼 자'라는 인간 군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진실과 정보에서 배제된 자 혹은 가짜 뉴스에 현혹된 자가 쉽게 떠오른다. 어쩌면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눈먼 척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출간된 지 약 30년이 지난 지금, 비상계엄 사태로 대혼돈에 빠진 한국 사회가 아른거린다. 사실과 진실이 가짜와 거짓으로 둔갑하고, 서로가 눈먼 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암흑기. 그 뒤에 남는 건 말의 쓰레기 더미뿐이다.

후속작에서 눈뜬 자들이 내린 선택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투표용지에 적힌 선택지를 거부하고 압도적인 백지투표를 했다. 평론가들은 시민들이 4년 전 실명사건 당시 갖게 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일종의 기존 제도와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비상계엄 사태로 날개 없이 추락 중인 한국 사회는 반전을 고대한다. 현상유지나 이전 상태로의 복원은 아닐 것이다. 아픈 만큼 더 성숙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강도 높은 회복 탄력성이 요구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긍정적 열의가 회복 탄력성의 핵심 요건이다. 대한민국 시민들의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의는 세계가 알아줄 만큼 탄탄하니 걱정할 게 없다. 우려되는 건 미숙한 제도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백지투표가 쏟아진 이유도 낡은 제도에 대한 부정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낡은 제도라면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꼽을 수 있다. 1987년 9차 헌법 개정 이후 37년 동안 세상은 크게 변했건만 제왕적 대통령제는 예전 그대로다. 10년 사이 대통령 탄핵 이슈가 두 번이나 터졌다는 건 기존 제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다. 개헌 논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문제는 주요 개헌 논의가 불리한 정국 전환용 카드로 활용됐다는 점이다. 정치적 상황논리가 개헌 논의를 쥐락펴락하는 형국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말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대한민국헌정회는 소모적 정쟁 해소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탄핵이라는 중대 상황논리에 개헌은 뒤로 밀릴 운명이다. 대통령 임기 단축을 통한 4년 중임제 개헌안도 여야 간 셈법이 달라 합의까지 길이 멀다.

흔히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만, 환경과 제도 영향도 크다. 제도 변화 없이 사람만 바꾼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낡은 체제가 낳은 '정치혐오'는 눈뜬 자도 눈먼 자로 만드는 전염병이다. 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소모적 저항 혹은 체념적 순응밖에 없다.
제3의 선택지가 남아 있긴 하다. 제도를 바꿔 눈뜬 자들의 도시를 개척하는 길이다.
개헌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이유다. jjack3@fnnews.com 조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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