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R&D와 우공이산

      2024.12.22 19:39   수정 : 2024.12.22 19:39기사원문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는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슈퍼컴퓨팅 등 첨단 분야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반도체는 1980년대 이후 설계, 공정, 패키징, 소재·부품·장비 등으로 전문 분업화되어 전 세계에 걸쳐 광범위한 연구개발(R&D)·공급망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정 분야가 첨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반도체 연구소 아이멕(IMEC) 사례를 살펴보자. IMEC은 100여개국 5500명 이상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글로벌 반도체 연구 허브이다. 대만의 TSMC, 네덜란드의 ASML, 독일의 자이스 등 글로벌 강자들을 포함해 1000개가 넘는 기업·연구소와 세계 최초·최고의 기술개발을 위해 손발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ASML과는 차세대 노광장비에 필요한 고개구율 극자외선(High-NA EUV) 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테스트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드는 과학기술 협력은 단순히 벽 허물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넘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자·연구기관이 지식·기술·경험·자산 등을 공유하면서 개별적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보다 창의적이고 포괄적으로 해결해 가는 실제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협력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더 번거롭고 복잡할 수는 있지만, IMEC에서의 협력처럼 기존 기술을 한 차원 더 도약시키는 혁신적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 글로벌 협력에 눈을 돌린 우리나라는 지난 한 해 동안 R&D의 저변을 전 세계로 넓히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먼저 약 140조원 규모의 유럽 최대 다자 간 연구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에 준회원국으로 가입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유럽의 우수 연구자·기관과 협력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유럽연합(EU)으로부터 직접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등 공동 R&D를 위한 발판이 만들어졌다. 둘째, 미국과 본격적 협력을 위한 준비도 마쳤다. 뉴욕대에 'AI 프런티어 랩'을 설치, 북미 유수의 AI 연구기관·기업과 협력 교두보를 마련했다. 또한 첨단바이오 분야 협력을 위한 '보스턴 코리아'도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바 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오 클러스터인 보스턴에서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브로드연구소와 같은 기관들과 함께 R&D, 인력양성, 데이터 공동 활용 등을 진행하는 사업이다. 셋째, 각지에 '산업기술협력센터'를 세워 차세대 산업 원천기술에 대한 협력도 추진한다. 미국의 MIT·예일대·존스홉킨스대·퍼듀대·조지아텍과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 등에 산업기술협력센터를 두고 세계 최고 연구기관과 우리 기업의 공동 R&D 플랫폼으로 활용할 것이다. 이 외에도 글로벌 협력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이륙 단계에 불과하다. 글로벌 R&D를 통한 가시적·실질적 성과를 누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노인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떠올린다.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음이다. 제대로 된 글로벌 R&D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환경·문화·생각이 다른 이들이 협력할 때 상호 간 신뢰를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신뢰는 단기간에 얻어지지 않고 꽤 긴 시간 동안 호혜적·보완적 관계를 유지할 때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R&D에 발을 내디디며 해외의 연구자들과 신뢰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고 필요한 것을 준비해 온 한 해였다. 앞으로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우리 연구자·기관이 해외의 우수 연구자·기관과 더 활발히 교류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어 R&D를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끝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혁신적이고 획기적인 성과를 계속해서 만들 것이라 믿는다.

류광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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