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이스탄불 ⑬

      2003.02.16 09:07   수정 : 2014.11.07 19:06기사원문

강선우는 못 들은 척한다. 그녀가 계속한다.

“과장급이면 보너스까지 5000달러… 그래, 6만달러짜리 연봉이구나.”

이번에는 강선우의 젖은 어깨와 허리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려가며, 더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잇는다.

“6만달러의 4곱, 24만달러 어때? 그 정도면 크라이슬러 중역 초봉 수준이야. 아니, 거기다 자동차하구 아파트도 제공하겠어. 비행기도 퍼스트 클라스로 타고 다니게 하고, 호텔도 스위트룸으로만 쓰도록 대우해 주겠어.”

강선우는 쏟아지는 샤워 물에 전신을 내맡기고 있다.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지금 지터버그 모텔에서처럼 브라이스 케니언 계곡 폭포 아래 서 있다.

폭포 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햇빛이 유난히 맑은 오후 한나절의 폭포는 흡사 다이아몬드 가루를 한꺼번에 쏟아 놓은 것처럼 영롱한 빛살이 난사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샤워기 아래만 서면, 늘 계곡의 푸르른 폭포를 연상하곤 했던 강선우다. 무지개송어도 마찬가지다. 파랑새의 울음도 그러하다. 물안개가 계곡을 휘감고 나가는 스스스 소리도, 잔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얼룩무늬범나비의 날개 접는 소리도, 타액을 쏘아 수면 위의 곤충을 잡아먹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소리도, 오렌지색 자벌레가 자귀나무 잎새를 갉는 소리도, 그루터기에 묻은 포유동물들의 갖가지 털들이 바람에 떠는 소리도, 정교한 레이더망의 작동인양 깡그리 다 잡아내고 있다.

그처럼 미세한 소리들을 압도하는 소리가 있다. 그레이스 최의 떨리는 듯한 허스키 음성이다.

“24만달러 연봉으로 널 다 사버리겠어, 몽땅!”

그녀가 강선우의 탄력있는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린다. 강선우는 새벽 침대 속에서도 그 소리를 듣는다. 소리 끝이 엥엥, 울렸다가 감기는 에코 효과까지 가미된 소리다. 아니, 그 소리 때문에 눈을 번쩍 떴다고 해야 옳다.

나른하다. 떠낼수록 맑아지는 옹달샘을, 샤워 끝내고 침대에 올라와서도 계속 퍼낸 탓일까. 그러나 기분 좋은 나른함이다. 더 자고 싶다. 푸짐하게, 그리고 늘어지게 자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옆자리에 누워 있는 그레이스 최는 밤새 라벤더 향내를 풍긴다. 뒤척이면 뒤척일수록 더 향기로워진다.

그녀를 본다. 깊이 잠들어 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줘도, 머리맡의 미니 전등을 켜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르는 원색의 잠에 깊숙이 빠져 있다.

밤새 너무 탐닉한 탓이다. 샘물을 욕심껏 퍼마신 후유증일 터다. 하지만 피곤해 찌푸린 얼굴이 아니다. 만면에 미소가 그려진, 아주 평화로운 표정이다. 뭐든 다 포용하고 수용할것 같은 자애로운 얼굴….

강선우는 시계를 본다. 정확히 4시다. 에구머니, 강선우가 시트를 걷어차고 일어난다. 뿌드득 뿌드득, 뼈마디가 터지도록 큰 기지개를 켠 다음 침대에서 뛰어내려 대충 샤워를 끝내고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대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는다. 계속 소녀처럼 쌕쌕, 잔코를 골고 있다.

강선우는 프랑스 애정영화에서 흔히 써먹는 방식대로 화장대 거울에 루주로 글씨를 쓴다.

“깊은 밤, 깊은 추억… 연락할게요, 안녕.”

강선우가 크라쿠프자동차 공장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약속보다 20분이나 이른 시간이다. 한데도 벌써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비단 동남직원들뿐 아니다. 크라쿠프 사람들이 더 많다. 임시 회장실로 쓰고 있는 귀빈 응접실 앞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어서 와, 강부장.”

강선우의 휴가로 임시 수행비서 업무를 맡고 있는 송부장이다.
그가 다시 한번 강선우의 위아래를 훑고 나서,

“강선우 부장.”

이라고 말끝을 마무리한다. 송부장까지 부장이라니… 솔직히 강선우는 쑥스럽다.
“아니… 부장이 뭡니까, 부장이?”

“회장님 특별 지시야, 당신이 나오면 그렇게 부르라고 당부하셨단 말이야.”

하긴 그 역시 한 계급 승진했다면 아마도 이사이거나, 이사 대우 지위일 터다.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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