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곡과 루머로 가득찬 인생
2009.06.26 18:17
수정 : 2009.06.26 18:17기사원문
한 시대를 풍미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난 그의 나이는 미국식으로 쉰, 한국식으로 하면 쉰 둘이다. 어떤 계산법으로 나이를 따져봐도 너무나 빠른 죽음이다.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열성팬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놀라움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이유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이름을 처음 알린 건 1964년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를 결성하면서부터. 형들과 함께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 ‘아이 원트 유 백(I Want You Back)’ 등을 히트시킨 어린 잭슨은 그러나 1975년 유명 프로듀서 겸 가수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잭슨 파이브’와 결별한다.
1978년 퀸시 존스와 합작한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은 발매되자마자 빅히트를 기록한다. 일종의 성인 신고식과도 같았던 이 앨범은 무려 1000만장이나 팔려나가면서 약관의 마이클 잭슨을 세계적인 팝 스타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1982년 내놓은 ‘스릴러(Thriller)’ 앨범에 비하면 첫 음반의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4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운 ‘스릴러’는 이듬해 ‘올해의 앨범상’은 물론 그래미 어워드 8개 부문을 휩쓰는 등 말 그대로 ‘초대박’을 기록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스릴러’ ‘빌리 진(Billie Jean)’ ‘비트 잇(Beat It)’ 등은 아직도 그의 대표곡으로 각인돼 있다.
이후 ‘배드’(1987년), ‘데인저러스’(1991년) 등 내놓는 음반마다 대박 행진을 벌였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마이클 잭슨에 대한 좋지 않은 루머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1993년 발생한 아동 성추행 사건이었다. 당시 11세인 조디 챈들러의 부모가 마이클 잭슨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것. 이 사건은 결국 2330만달러의 합의금을 소년의 부모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종결됐지만 대중의 입방아마저 막지는 못했다.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자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하면서 잭슨은 대중의 관심을 다시 받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쳐 얼굴 성형과 표백 수술 등을 받던 잭슨은 이 과정에 만난 간호사 출신의 데비 로와 두번째 웨딩마치를 울렸지만 이 역시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2001년 음악적 재기를 꿈꾸며 내놓은 새 앨범 ‘인빈서블(Invincible)’도 새로운 발판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2003년에는 또다시 14세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건은 결국 마이클 잭슨의 무죄로 끝났지만 그의 이미지는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오는 7월 8일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기로 했던 컴백 콘서트는 마이클 잭슨이 가수로서의 부활을 꿈꿨던 마지막 무대였지만 하늘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