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빌리들’ 꿈을 향해 날다
2013.10.28 17:26
수정 : 2014.10.31 20:31기사원문
【 뉴델리(인도)=최진숙 기자】 첨단 문명과 극단적 무질서가 공존하는 인도 뉴델리. 가는 곳마다 거대한 인파와 쓰레기, 매연, 각종 교통수단의 경적 소리가 뒤섞인 혼돈의 도가니지만, 인류 문명의 뿌리를 둔 이곳의 문화적 매력은 그 깊이가 가늠이 안된다는 점에서 낯선 방문자를 설레게 한다.
가난한 탄광촌에서 자라 영국 로열발레단 무용수의 꿈을 이룬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를 닮은 인도 아이들을 만난 건 지난 25일 오후 뉴델리 남쪽 한국문화원 강당.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의 지도로 한창 발레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10대 아이들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자 시작해 볼까요.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김지영의 구령에 맞춰 까만 타이즈의 23명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 중 절반은 뉴델리 외곽 신도시 구르가온에서 두 달 전 문을 연 발레학원 학생들이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나도 출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목을 들고, 포인트는 여기예요" "그렇죠, 바로 그거예요!" 김지영의 목소리는 자꾸 커지고 있었다. 이영철, 송정빈, 신승원 등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의 시범 지도까지 가세하면서 수업 열기가 한창 고조될 무렵, 김지영은 맨 앞줄 오른쪽 두 번째 학생을 지목했다. 앞으로 나와 혼자 해보라는 지시에 주뼛주뼛 걸어나온 학생은 작은 키의 프린스 샤르마(16). 한 쪽 다리를 팽팽하게 뻗는 '탄듀', 다리 한 쪽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는 '피루엣'을 이 소년은 한번에 깔끔하게 완성시켰다. "와우!" 샤르마를 둘러싸고 환호성이 터졌다. 수업이 끝난 직후 김지영은 "샤르마는 두 달밖에 안 배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웬만한 발레 단원보다 나은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이런 전문적인 수업은 처음"이라며 감격스러워 한 샤르마는 일종의 검정고시 같은 오픈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다. 매일 등교하지 않는 대신 특정 과제물을 제출하고 시험을 본 후 졸업장을 받게 해주는 시스템이 인도의 오픈학교다.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주로 이 오픈학교를 다닌다. 비율은 전체 학생의 15% 정도.
발레라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본 게 전부였던 샤르마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구르가온의 발레학원을 두 달 전 등록했다. 그때부터 춤, 발레는 샤르먀의 전부가 됐다. "월요일 빼고 낮 12시부터 밤 8시까지 안 쉬고 춤을 춥니다. 춤을 추면 다른 건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 그게 좋습니다."
이날 수업을 받은 이들은 대체로 샤르마와 비슷한 환경이었다. 고윈드 쿠마르(19), 브루마 바트라(18) 등 대부분이 우연히 알게 된 발레를 이제 삶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난 상태의 1100루피(약 1만8000원)짜리 토슈즈를 신은 이들은 "토슈즈는 한 번 사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무조건 신는다"고 했다.
구르가온 학원 원장 산제이 카트리(30)는 "인도에선 부족함 없는 집안의 아이들은 춤을 할 생각을 안 하고 산다.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일수록 춤에 매달린다"며 "고달픈 생활에서 발레가 생의 기쁨이자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뿌듯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도 과거 샤르마 같은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카트리는 샤르마 같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별다른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치기 위해 성인반 수업, 개인 레슨, 기관 후원 등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한다.
카트리와 이 '인도의 빌리'들은 지난 26일 뉴델리의 유일한 대형 공연장 시리포트 극장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한·인도 수교 40주년 기념 공연도 관람했다. 이날 공연에서 발레단은 창작 발레 '왕자호동', 인도 무희를 소재로 한 '라 바야데르' '돈키호테' 그랑파드되, 낭만발레 '지젤' 2막을 선보였다. 1800석 대극장은 초대받은 뉴델리 시내 18개 초·중·고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전석을 빼곡히 메운 학생들은 장면 곳곳에서 "브라보!"를 외치며 생애 첫 발레 공연을 만끽했다. '돈키호테' 바질 역 김기완의 경쾌한 솔로춤에선 아이들의 휘파람이 물결 쳤다. 거대한 환호에 힘입어 무용수들은 무대를 훨훨 날았다. 샹카르 비하르 지역의 APS중학교에 다니는 스웨타 나예르(14)는 "'지젤'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고 했다.
공연 직후 만난 샤르마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며 "저런 무대에 꼭 서 봤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춤추고 싶다"고 했다. 샤르마와 친구들은 공연이 다 끝난 무대에 올라 전날 배운 동작을 직접 해보며 즐거워 했다.
공연 당일 새벽까지 극장 무대를 점검했던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은 "2000년대 초반 러시아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처음 한국 무용수들과 마주하던 때가 생각난다"며 "한국 발레는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지도와 사랑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한국 발레가 세계 발레 오지의 아이들에게 베풀어야 할 때가 됐다. 인도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jins@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