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영웅, 테러리스트
2014.03.26 17:21
수정 : 2014.10.29 01:21기사원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는 일본의 위인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아무리 곱게 보려 해도 곱게 볼 수 없는 그이지만, 일본 역사에서는 영원한 거목이다. 개화기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고 총리 네번에 추밀원, 귀족원의장까지 지낸 그를 위인에 넣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천엔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이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던 것(1963~1984년)도 그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는 증거다. 일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마지막 인상은 총탄에 쓰러진 애국자다. 그것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테러리스트'라고 막말을 날린 한 한국인의 총에 맞아 숨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적이다. 간교한 술수와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는 데 앞장선 침략의 원흉이다. 동양평화를 앞세우면서 뒤로는 총칼로 이웃나라들을 짓밟은 평화의 파괴자다. 안중근 의사(1879~1910년)가 지적한 이토의 죄는 무려 15가지다. 안 의사는 법정 진술에서 △대한제국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 동양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죄 등을 이토 단죄 이유로 들었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처형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재판 관할권도 없는 일본이 1910년 2월 10일부터 불과 일주일간 여섯 차례에 걸쳐 속사포식으로 진행한 공판에서다.
이토와 안 의사를 보는 시각은 이렇게 극단적이다. 한쪽의 '위인'이 다른 한쪽에서는 용서못할 '원흉'으로, '영웅'이 '테러리스트'로 확 뒤집어진다. 식민지배의 가해국과 피해국의 입장 차에서 오는 숙명적 결과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안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건 1909년 10월 26일 아침.
104년여의 세월이 지난 오늘, 그때의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 낸 건 다른 뜻에서가 아니다. 당시와 단순 비교할 순 없어도 적지 않은 곳에서 삐거덕거리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 두 나라의 관계가 안타까워서다. 이 같은 험악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일본의 정치인, 각료들이 역사 공부를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또한 솔직한 이유다. 비뚤어진 과거사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요구가 성가실지 몰라도 그들의 '반성'과 '겸허'는 보통의 일본인들 것보다 더 깊고 더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위인전 속의 이토 전기를 읽으며 자랐다 해도 정부 대변인이 이웃나라의 애국지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욕 주는 악의적 발언이 반복되는 한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먼 나라'다. 침략을 진출이라는 용어로 포장한 역사교과서로 일본이 자국 학생들의 눈을 가린다 해도 한국의 교실에서는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조선을 짓밟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기억이 흐릿할진 몰라도 근세기 대한제국의 치욕과 일제 강점기 고통을 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지도자들은 오늘도 반성과 참회를 뒤로 물린 채 적반하장의 거짓으로 도발을 일삼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역사교과서 검정결과의 뚜껑을 곧 연다. 이미 공개됐어야 할 결과가 늦춰졌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5일(현지시간)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을 의식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포석이 잔꾀인지 아닌지는 결과만 나오면 가려진다.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갑다'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역사교과서가 진실을 거듭 외면하고, 정치인들이 후안무치의 막말 경쟁을 멈추지 않는 한 결말은 뻔하다. 한국을 가장 소중한 이웃이라고 치켜세우는 아베 총리의 발언은 또 한차례의 속임수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정상회담을 수십번 한다 해도 벌어진 두 나라 사이는 좁혀질 턱이 없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26일은 뤼순감옥에서 안 의사가 일본에 의해 죽음을 맞은 순국일이다. 안 의사의 곧은 인품과 동양 평화를 갈구한 진심은 수십점의 유묵에 생생히 살아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안 의사의 옥중 일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래도 테러리스트라는 막말을 입에 올릴지 궁금하다.
tanuki2656@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