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2015.04.15 17:13   수정 : 2015.04.15 17:48기사원문

돈의 일생은 생각만큼 화려하진 않다. 한국은행의 금고를 떠나는 날이 출생일이다. 세상에 나오면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간다. 그렇지만 지갑이나 금고에 갇혀 어둠 속에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수명은 수개월에서 길어봐야 1~2년 정도가 고작이다. 그 후엔 다시 한은에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5만원권 지폐는 더 비극적이다. 한은을 떠나자마자 실종돼 소식이 끊기는 경우가 많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5만원권의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의 비율)은 29.7%에 그쳤다. 100장 가운데 30장만 돌아오고 70장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얘기다. 5만원권의 환수율은 지난 2012년까지만 해도 60%를 넘었다. 지난 3년 사이 반토막이 난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5만원권 발행잔액은 52조원에 이른다. 지난해의 예로 보면 이 중에 상당 부분은 환수되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11년 4월 전북 김제시의 어느 마늘밭에서 110조원의 뭉칫돈이 발견됐다. 발견된 돈은 5만원권 22만여장으로 10개의 사과상자 안에 담겨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돈의 출처는 도박장 수익금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2월에는 서울의 한 백화점 물류센터에서 5만원권으로 10억원의 현금뭉치가 발견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은신처에서 5만원권으로 8억3000만원의 비자금이 나왔다.

돌아오지 않은 5만원권들은 불법.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개연성이 크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에도 고액권 발행에 따른 찬반 논란이 치열했다. 007 가방 한 개에 5만원권을 가득 담으면 5억원이 들어간다. 10㎏짜리 사과상자로는 10억~12억원을 담을 수 있다. 1억원 정도는 남의 눈을 피해 손쉽게 전달할 수 있다. 자손들에게 세금 없이 현금으로 증여하는 수단으로도 안성맞춤이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은행저축 대신 현금보유를 늘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한은은 실증분석 결과를 토대로 저금리와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잇따른 금리 인하로 저축 유인이 약해진데다 글로벌 거시경제의 불안이 화폐수요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5만원권으로 3000만원을 건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5만원권이 또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5만원권 안에 그려진 신사임당을 보기가 참으로 민망하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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