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무대위의 암사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2015.08.17 18:34   수정 : 2015.08.17 18:34기사원문
휴가철이 막 시작되던 무렵, 강원도 횡계의 한 작은 성당에서 그를 만났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사진). 한때는 '무대 위의 암사자'로 불리던 음악가다. 자신이 완벽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면 세계 최고의 무대도 거절하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평상복 차림으로 자그마한 성당 무대에 서 있었다.


연주를 시작하려는 정경화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잡음을 줄이기 위해 에어콘을 끈 성당에서 관객은 연신 부채질을 했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부산스러움 속에서 연주가 시작됐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 C장조. 그가 열아홉살이 되던 해 콩쿠르 우승을 차지했던 곡이다. 순간, 잡음은 모두 사라지고 그의 바이올린 소리만 성당 안을 꽉 채웠다. 모두 집어삼킬 듯한 카리스마와 열정, 일흔을 바라보는 노장의 선율은 여전했다.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며칠 후, 정경화를 다시 만났다. 인터뷰 장소로 강아지 두 마리가 먼저 뛰어들었다. 그의 반려견, 클라라와 요하네스. 정경화는 내 아들, 딸이라고 소개했다. 클라라를 품에 안은 그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4년 전 작고한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게 여섯살이 채 되기도 전인데. 피아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까 어머니가 바로 바이올린을 사다 주셨어요. 그리고 딱 2주 후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조회시간 때 단상에 올라가 연주를 했어요. 어머니가 교장선생님을 설득해 나를 거기에 올려 세웠죠."


그는 아홉살이 되던 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했고, 열세살에는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된다.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통찰력, 설득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열성적인 교육가, 말도 못하는 애국자였다. 독립운동가였던 외할아버지 피를 물려받아서 한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대단했다. 아이들을 음악가로 키운 것도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어머니는 실력을 몸에 붙여준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디라도 몸만 가져가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줬다. 나는 평생 "엄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살았다.

그는 열아홉살이 되던 1967년, 미국의 권위 있는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한다. 누구나 주커만의 우승을 확신하던 때였다. 무명인데다 동양 여성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만들었다. 파이널에서 흔들린 주커만이 실수를 저지르며 정경화의 우승이 예상됐다. 하지만 심사위원장은 주커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줬고, 사상 유례없는 두 번의 파이널 끝에 공동 우승이 결정됐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동양인 여성으로 힘든 환경이었을 것 같다.

▲열여섯살에 연주를 시작했을 때,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그들에게 누구보다 신비한 소리를 들려줘야 했다. 절대 스스로에게 만족을 못했다. 관객이 기립박수를 쳐도 미쳤다고 화를 낼 정도였다. 외롭고 고단했다. 그래도 그렇게 산 덕에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년 후 기회가 찾아왔다. 1970년 5월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 정경화는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다. 그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연주가 끝나자 엄청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프레빈은 그 자리에서 다음 협연을 제안했고 무명이던 그녀는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그날 연주도 운이었나.

▲콩쿠르에 우승하고 2년이 지나면서 무대가 사라지던 중이었다. 다시 콩쿠르를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때 만난 찬스다. 내가 늘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있다. 운이 너를 찾아올 때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선생님이 늘 하신 말씀이다. "다이아몬드는 흙 속에 있어도 광채를 잃지 않는다. 조급해하지 마라. 늘 빛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그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유대인이 주름잡던 국제 음악계에 오로지 실력만으로 빛을 발한 한국인 바이올린니스트. 무대에서 그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와 열정은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했다. 그에게는 '현의 마녀' '무대 위의 암사자' 같은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정경화의 열정에 제동이 걸린 건 지난 2005년이다. 게르기예프-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손가락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이후 2011년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6년이란 오랜 슬럼프를 겪었다. 그 사이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화가 복이 된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고 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전의 나는 스스로를 항상 몰아부쳤다.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 숨도 쉴 수 있는건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많은 것을 내려놨다. 완벽한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전처럼 완벽을 따지면 설 수 있는 무대가 없다. 요즘은 "꾸준히,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무대를 내려온 '암사자'의 열정은 이제 어린 연주자들에게 옮겨갔다. 2007년 줄리아드 음악원의 교수직 제안을 받아들였고 2012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석좌교수가 됐다. 2011년부터는 첼리스트인 언니 정명화와 함께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세계적인 연주자를 키워내는 일을 '사명'이라고 했다. 인터뷰의 많은 시간을 영재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썼다. "'금나와라 뚝딱' 하는 방망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재도 기르고, 불쌍한 사람도 돕게."

―60년대와 비교하면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음악이 좋아서 했고, 세계적인 연주자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요새는 그런 꿈을 쉽게 가질 수가 없다. 성공하려면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고 콩쿠르에서 1등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들어가면 진도부터 묻는다. 내가 "너는 뭘 느끼니? 뭘 표현하고 싶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진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는거다. 연주자들은 무대에 올라갈 때 관객에게 뭘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 영혼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찾아서 전달해야 한다. 그걸 숨쉬듯 느끼며 사는 것이 예술인의 삶이다. 목표를 딱딱하게 세우면 영혼을 키울 여유가 없어진다.

―왜 영재 교육에 그렇게 관심을 갖나.

▲한국 애들 실력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을 뒷받침할 시스템이 부족하다. 나는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음악가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다.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60대까지도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에는 실력은 좋은데 돈이 없어 묻히는 안타까운 아이들이 너무 많다.

―영재교육 시스템의 문제는 뭔가.

▲무대에 설 기회가 부족하다는 거다. 유럽에서는 콘서트홀 D-C-B-A 순서로 무대 경험을 쌓는다. D는 지역 무대들, A가 런던, 뉴욕, 암스테르담 등 세계 주요 무대다. D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다보면 A는 저절로 된다. 우리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국제 콩쿠르를 나가면 아무리 실력이 좋은 아이들도 파이널 무대에서 제 기량을 못 펼친다. 처음 서보는 큰 무대를 전날 한번 훑어보고 어떻게 연주가 되나. 그런 일을 반복하다보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콩쿠르를 나가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 크레딧 스위스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키우는 아이들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데뷔 무대를 갖는다. 우리도 정부와 기업이 재단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앞으로 아이들을 위해 연주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되물었다. "내 나이가 칠순인데 할 수 있을거라고 보세요? 성당 연주도 사실 주제 파악 하려고 한건데. 어땠어요? 그래도 한게 안하는 것보다 나았죠? 아직은 한게 더 낫죠?"

―앞으로 연주 계획은.

▲바흐 바이올린 무반주 전곡 녹음도 하고 싶고, 글로벌 투어도 계획하고 있다. 사실 굉장히 조심스럽다. 예전처럼 완벽한 연주를 원했다면 엄두도 못냈을 일이다. 지금은 아이들을 위해 나서보려고 한다. 글로벌 투어를 하면 관심도 모일테고 스폰서도 받기 쉬워지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그에게 바이올린과 함께 한 인생은 행복했는지 물었다. 요하네스를 끌어안으며 정경화가 웃었다.

"말이 60년이지, 아직 시작도 안한 기분이예요. 음악의 깊이, 예술의 깊이는 그만큼 상상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살면서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어요. 기가 막힌 부모님, 형제들, 스승을 만났고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뤘죠. 그래도 쉽진 않았어요.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살았는지. 이젠 주제 파악도 다 했고, 아무 눈치도 안보고 사니 너무 좋아요. 관객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연주하고, 집에 오면 이 아이들(클라라, 요하네스)에게 사랑받고 사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하하"

지면을 빌어 그에게 못다한 대답을 하려 한다.
대관령 성당 공연은 정말 좋았다. 한여름 오후 2시, 에어콘이 꺼진 실내에서 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한 건 계속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클래식의 미래는 정경화, 당신을 가져서 참 다행이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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