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2016.10.25 17:18   수정 : 2016.10.25 17:26기사원문

나는 개헌 반대론자이다. 헌법이 지고지선해서가 아니다. 헌법은 고칠 수 없는 신성한 문서라서도 아니다. 개헌론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우리 정치의 문제가 헌법 탓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단임제의 한계, 제왕적 대통령제 등은 우스운 얘기다. 5년 단임제가 문제라면 대통령은 반드시 4년 중임으로 8년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제왕적 대통령이 법 하나 통과시키려고 몇 년째 국회에 호소하고 있는가. F학점짜리 국정감사가 헌법 때문인가. 한마디로 정치 실종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었다. 실력도 없고,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도 없는 학생은 낙제점을 받는 게 당연하다. 좋은 만년필이 없어서 F학점을 받았다면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헌법만 바꾸면 정치가 잘 될 것이다? 200원짜리 볼펜 대신 200만원짜리 명품 만년필을 사주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학생과 똑같다. 근본적으로는 이 같은 인식에 변함이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개헌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호가 가라앉고 있다는 경고음은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내리막길을 걷는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나라 전체를 감싸고 있다. 비단 삼성과 현대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폐업과 실업이 속출하면서 밑바닥 경제부터 무너지고 있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음울한 미래를 예측하며 몸을 사리고 있다. 법치는 실종되고 막말과 드잡이만이 판을 친다. 과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패륜범죄가 터져 나온다. 가족과 사회 해체로 가는 수순이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을 불러온 극단적인 양극화와 아노미의 현실이 우리에게도 닥친 것이다. 생존을 좌우하는 안보상황조차 위기국면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센 풍랑에 좌초되는 한국호이지만 책임자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선장과 항해사와 기관사 모두가 실종상태다. 정치권의 관심은 오직 정권을 지키느냐 빼앗느냐에만 쏠리고 있다. 그래서 개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개헌 논의가 본격 시작되면 말 그대로 블랙홀이 될 것이다. 권력구조만 해도 그렇다. 4년 중임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등을 놓고 의견이 갈릴 것이다. 통치구조만 손대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기본권과 남북관계 문제 등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이 분출하며 갈피를 잡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느닷없는 개헌 제안은 문제를 더 꼬이게 할 뿐이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로 초래된 정치적 위기를 덮어보려는 속내를 누구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해야 한다는 청와대의 인식은 더 복잡한 정쟁의 구렁으로 몰고 갈 뿐이다. 한마디로 될 일도 안되게 만드는 첩경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개헌에 대한 국민의 뜻을 모으는 것이다. 개헌이 뜨거운 추진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의 삶이 개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분점' 운운은 정치인들만의 논리일 따름이다. 개헌을 하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할 것인지 청사진을 보여야 한다.
국회에서 빠른 논의를 주도하되 국민의 공감대를 모으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새출발을 위해 개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개헌 논의마저 정쟁으로 얼룩진다면 속절없이 침몰해가는 대한민국호를 바라보기만 한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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