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죽은 사람은 있는데 가해자는 없고"

      2018.03.12 15:30   수정 : 2018.03.12 15:30기사원문

지난달 15일 서울의 한 대형병원 간호사 박모씨(27)가 아파트에서 투신한 뒤 간호사들은 "죽은 사람은 있는데 가해자는 왜 없느냐"며 허탈해 했다. 유족은 '태움 문화(직장 괴롭힘)가 원인'이라고 주장, 경찰이 수사 중이다. 그러나 박 간호사가 동료들에게 왕따, 과도한 일 떠넘기기 등을 당했다 해도 처벌은 어려운 실정이다.

직장 괴롭힘에 대해 뚜렷한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병원은 왕따, 일 떠넘기기 등 괴롭힘 재발방지책을 마련중이다.

12일 국가인권위원회의 '2017 직장괴롭힘 실태조사'에 따르면 괴롭힘을 당한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아무 대처를 하지 않았다. 회사에 구제를 요청한 경우는 10명 중 1명에 불과해 스스로 참는 게 일반적이었다.

선배 잘못인데.."네가 경위서 써"
대형병원 2년차 간호사인 A씨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A씨는 얼마 전 선배 간호사로부터 큰 실수가 발생해 '네가 경위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선배 간호사 중 1명이 의식이 없는 환자의 피를 뽑기 위해 팔 부위에 지혈대를 묶었다. 이후 제거하지 않고 24시간 가까이 방치해 사달이 난 것이다. 이 실수는 가장 막내인 A씨가 뒤집어 썼다. A씨는 "선배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발뺌했고 나는 '신입이 문제지'하는 마음에 꾹 참았다"고 전했다.

본지가 국내 대형 병원 3곳과 일부 대기업 등의 취업규칙을 확인한 결과, 직장 괴롭힘을 명시한 곳은 거의 없었다. 현대자동차 정도가 노·사간 단체협약에 예방·처벌 규정을 뒀다. 대개의 기업은 취업규칙 징계 부분에 '기타 품위 손상'이라는 사유가 직장 괴롭힘을 규제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귀에 걸면 귀걸이식 해결책이 아니라 직장 성희롱 문제과 같이 구체적인 대응 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많은 병원에서 태움 문화 등이 계속 문제됐지만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적극 해결하기 보다 이런 문화로 업무가 잘 돌아간다는 인식으로 방치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현행법상 이와 관련한 명확한 규정도 없다. 피해자들은 민사 소송을 통해 회사나 가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이상혁 한국노총 노무사는 "폭행, 성희롱 등 현행법 위반 사안은 처벌이 가능하지만 현행법 체계에서 왕따 등 교묘하게 이뤄지는 괴롭힘은 가해 행위 처벌이나 구제 가능성이 낮다"고 밝혔다.

"스스로 한직 발령 요구"
가해자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근무하고 피해자가 모든 문제를 떠안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방송업에 종사하는 여성 B씨(30)는 상사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부에 요청해 제작부서에서 한직으로 불리는 비제작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상사는 휴가 중인 A씨에게 본인 통장 입출금내역 확인을 요구하고 비키니 입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A씨의 카카오톡 대화를 훔쳐본 적도 있어 "가끔 '세제를 먹고 죽어버릴까'하는 생각을 할 만큼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인권위 조사 결과 괴롭힘 가해행위에 대한 징계나 부서, 근무지 이동 조치는 8.4%에 불과했다.
피해자의 절반 이상인 53.9%는 '괴롭힘 대처 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문강분 행복한 일 연구소 대표는 "기업 내에는 괴롭힘이 발생해도 구제하고 예방할 만한 구체적인 대책이 없다"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는 취업규칙에 직장 괴롭힘에 대한 교육, 징계, 사후구제 방안을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품위 손상' 등 애매한 대응책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 등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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