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중인 英 로빈 후드 가든에 사는 세 가구 영상에 담아… "공간에 축적된 삶의 흔적 담아"
2018.05.28 17:18
수정 : 2018.05.28 17:18기사원문
【 베니스(이탈리아)=박지현 기자】 "공간에 축적된 사람의 흔적, 그 속에 담긴 에너지와 히스토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개막에 맞춰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인근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한국 설치미술가 서도호(56)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도호는 공간과 개인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로 이를 조각과 설치, 영상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예전부터 베니스에서 전시를 하기로 계획은 돼 있었어요. 근데 마침 이번 비엔날레 건축전에 참여하면서 일정을 조정해 같이 전시하게 됐죠."
산마르코 광장 서쪽에 위치한 갤러리에는 그가 10여년 전 시작했던 '러빙/러빙(Rubbing/Loving) 프로젝트'의 최근작들이 전시됐다. 액자 속에 들어있는 밸브와 헤어드라이어, 전화기, 소화기의 형상. 가까이 들여다 보니 얇은 종이들이 물에 젖었다가 마르면서 굳어진 형태다. 사람들이 오랜 기간 써서 손때가 묻고 닳고 닳은 소품들이 그의 작품 소재다.
"손때를 타 변화한 물건 속에는 모두 사람의 흔적이 담겨있죠. 이걸 보존하고 싶었어요. 보존의 방식은 다양하죠. 때로는 실, 천이 될 수 있고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로 탁본하는 것이 됐죠.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영상 작업을 잘 보여드리지 못했었는데 이번 비엔날레 건축전에 나온 것은 곧 철거될 집에 대한 기록물이죠. 주택 역시 거기 살았던 사람들 흔적이 모두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그 흔적들을 통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과거 우리나라의 세운상가처럼 런던의 외딴섬이 되어버린 '로빈 후드 가든'은 주변 지역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서 2개 동 중 한 채는 이미 완전 철거됐다. 서 작가는 철거를 앞둔 나머지 건물에 이미 비어있는 집 한 가구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세 가구의 내부 풍경을 수직과 수평으로 이어지는 타임랩스 영상으로 제작했다. 흔히 사용되는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면 한 가구 당 2시간이면 촬영을 끝낼 수 있었지만 서도호는 스틸 사진으로 가구당 8시간에 걸쳐 촬영한 후 프레임을 합쳐 영상을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가의 노력은 가로 13m의 거대한 스크린에 담겼다.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공간 속에 머무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작가는 "올초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런던만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건물을 갑작스레 철거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파괴하고 삶을 뚝 잘라내는 과정은 비인간적"이라고 했다.
베니스에서의 전시는 내년에도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내년 2월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에서의 전시가 그 출발점이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