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꾸준함… 매달 머리 깎아주니 아이들 마음도 열렸어요"
2019.01.17 18:20
수정 : 2019.01.17 18:20기사원문
머리카락을 자를 때 쓰는 보자기를 씌우자마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차게 말했다. 이유를 물은 뒤 이내 머쓱해졌다. "멋져서요." 당연한 답. 아이는 보자기를 벗자마자 달려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서울 구로구 오류로에 자리 잡은 아동양육시설 오류마을의 식당은 활기찬 미용실로 변한다. 소소한 일상 속 소풍 같은 시간이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다.
제법 쌀쌀했지만 화창한 날이었던 지난 6일 오류마을을 찾아갔다. 이지안 헤어 디자이너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매달 첫째주 일요일이었다. 이씨와 함께 미용봉사를 하는 두 명의 청년 헤어 디자이너들이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달려왔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힘들지 않아요, 전혀"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이씨의 가위질은 낮 12시가 넘어서야 멈췄다. 꼬박 2시간. 이씨는 다른 두 명의 청년 봉사자와 함께 40명이 넘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쉴 새 없이 잘랐다. 사각, 쓱, 웨엥. 가위와 흔히 '바리깡'이라고 부르는 헤어 클리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멀찍이 서서 아니 가끔씩 앉아가면서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허리가 아팠다. 그래서 머리카락 자른 아이들이 모두 방으로 돌아간 뒤 단숨에 물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이씨는 "체질은 타고 났다"면서 웃었다. "다리가 조금 아프지만 서서 일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헬스장에서 틈틈이 운동을 하는 게 굳이 비결이라면 비결. 이씨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를 때 손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앉은키가 작은 아이들의 앞머리를 보면서 자르기 위해 앉았다 일어나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허리를 숙이거나 앉아서 아이들의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에겐 즐거움이다.
졸음이 오는 아이들이 있거나 지루할 새가 없이 이씨는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새해에는 몇 살 됐어?" "지민(가명)이는 한달 만에 살이 찐 거 같아" "머리 자르고 맛있는 거 먹을거야?" "짧게 잘라줄까, 길게 잘라줄까?" "가르마를 사선으로 따서 자르면 예쁘겠다." 이씨와 아이들, 생활복지사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소중한 아이들과의 약속
이씨에게 양육시설 아이들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날은 꼭 지켜야 될 소중한 약속이다. 그 약속이 생긴 지 30년 가까이 됐다. 이씨는 미용사 자격증을 땄던 지난 1993년부터 양육시설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충북 음성군에 위치한 음성향애원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휴대폰도 없어서 휴일에 연락이 잘 안됐어요. 약속을 했으니까 무조건 가는 거였죠. 그때는 아이들이 진짜 많았어요. 다 못 자르고 오는 경우도 있어서 한 달에 몇 번을 가기도 했어요."
이씨는 음성향애원에서 10여년 동안 미용봉사를 하다가 대학 학위를 따기 위해 잠시 멈췄다. 학위를 받은 뒤엔 곧바로 돌아왔다. 다만 두 번째 봉사할 수 있는 곳은 가까운 데서 찾기로 결정했다. 휴일인 일요일에 미용봉사를 할 수 있는 오류마을과 연이 닿았다. 그렇게 한달에 한번씩 오류마을 아이들을 만난 시간도 8년이 흘렀다. 처음 봤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훌쩍 자라 성년이 됐다. 이날은 성년이 돼 자립한 정욱씨(가명)도 왔다. 정욱씨는 계속해 찾아오는 이유를 "돈도 아끼고 익숙해서요"라고 했다. 이에 이씨는 "취업하면 바리깡을 사주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사줬다"며 농담을 건넸다. 정욱씨가 매달 이곳을 찾는 이유가 단지 익숙함과 절약 때문일까. 봉사는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하게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섣불리 들추면 덧나기 마련이다. 오류마을 김혜숙 원장과 20여명의 생활복지사들이 바라는 것도 가족과 친구처럼 아이들과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결연 후원이다. 이씨도 꾸준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봉사는 일회성이 많아요.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는 연습을 하려고 오거나 직원을 가르치려고 데려온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거든요. 아이들도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 않아요. 친해지기 위해서 빠지지 않고 꾸준히 얼굴을 보여줬어요."
■아이들은 삶의 활력소
이씨가 미용봉사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거창한 이유는 없다. 미용이 가장 잘 하는 일이고, 아이들이 예뻤다.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정말 없어요. 봉사하라는 뜻인지 몸이 아팠던 경우도 별로 없고요. 주변 사람들은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해요. 그냥 당연히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지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잘 안 들어와요."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칭찬을 듣는 순간이다. 머리카락을 자른 아이들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게 될 때다. 이씨는 "저희가 왔다 가면 애들이 인물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다"며 웃음을 지었다.
오류마을 아이들은 이씨는 물론 미용봉사를 하는 두 청년 헤어 디자이너들에게도 삶의 활력소다. 이씨와 4년 동안 매달 미용봉사를 하고 있는 강태욱씨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게 좋다"라며 멋쩍어했다. 2년 넘게 이들과 아이들의 머리를 깎는 조재윤씨는 "일을 하다 보면 힘든 일이 있고 슬럼프도 찾아온다"면서 "힘이 넘치는 아이들을 보면 위안을 받고 힘을 얻는다"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고마워했다.
이씨는 혼자서 미용봉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스피드(속도)'다. 조금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도 아이들은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이씨의 작은 바람은 함께 팀을 이뤄 봉사를 할 수 있는 봉사자가 조금이나마 늘어나는 것이다.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더 힘이 났다. 이름도 모르지만 음성향애원에서 미용봉사를 할 때마다 나서서 도와줬던 간호선생님도 그런 존재였다. 이씨는 지금 함께 봉사하고 두 청년과 오랫동안 미용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팀 이름도 지었다. '꽃처럼 활짝 웃으며 봉사하는 우리'라는 뜻을 담아 어감이 비슷한 '꽃봉오리'로 정했다.
이씨는 아이들을 위한 미용봉사는 60대까지 해보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아이들이 불편할 수 있는 나이가 언제일지 생각해봤다"면서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는 나이 드신 분들을 돕는 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gmin@fnnews.com 조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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