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괜찮아' 위로 전하는 패션모델

      2019.05.04 07:59   수정 : 2019.06.01 10:33기사원문
2005년 영화배우 황정민은 제26회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상소감을 발표한다.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배우 황정민처럼 맛있게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우들이 차려진 밥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결과물이 달라진다.



4년차 패션모델 수야가 생각하는 모델의 역할도 배우와 같다. 런웨이에서 당당하게 걷는 모습, 잡지에서 다양한 포즈를 짓는 모습. 우리가 패션모델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이다.
때문에 패션모델을 마네킹쯤으로 취급하면서 '옷 몇 벌 입고 편하게 돈 번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사람들이 툭툭 내뱉는 말에 쉽게 상처받는다며 그녀는 이렇게 되묻는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표현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마네킹을 쓰지 왜 인건비를 들여가며 모델을 쓰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각을 표현해온 그녀는 패션잡지 촬영을 할 때마다 사진 프레임 속 하나의 재료가 된다. 어느 날 색연필이 됐다가 어느 날은 물감이 된다. 색감에 대한 이해가 높은 덕분일까. 촬영 콘셉트를 색감으로 파악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촬영장에 가면 배경과 조명 색감을 보고 그날 촬영 분위기를 짐작해요. 예를 들어 강렬한 빨간색의 배경과 조명이 준비돼있으면 얌전한 느낌이 아닌 강한 느낌의 촬영이라고 받아들이고 표정이나 포즈를 준비하죠."

■모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매력이 있죠

우연한 계기로 룩북(lookbook)을 촬영하며 모델 일에 흥미를 느낀 그녀는 유명 패션매거진 보그 코리아(Vogue Korea)를 통해 전업 모델의 길로 들어섰다. 모델을 꿈꾸며 학원에 다니거나 오디션을 통해 데뷔하는 일반적인 경로와는 다른 방식이다.

"친구가 부탁해서 첫 룩북을 찍은 후에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접 일을 찾으러 다녔어요. 물어볼만한 지인들이 없어서 SNS를 통해 모델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죠. 그러다 룩북 모델을 찾는다는 글을 봤어요. 처음으로 상업 작업에 참여하게 됐죠."

이후 룩북과 개인작업을 병행하며 경험을 쌓아가던 중 이메일 한통이 도착한다. SNS 계정에 올린 사진들을 보고 연락해온 보그 코리아 기자였다.

"처음엔 스팸인줄 알았어요. 이렇게 큰 매거진에서 연락이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너무 떨려서 잠도 못 잤어요."

매거진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이후 보그 코리아, 엘르 코리아(ELLE KOREA), 더블유 코리아(W Korea)와 같은 매거진 촬영을 주로하며 가끔은 패션쇼 무대에도 서고 있다. 미국 진출도 준비 중이다. 이번에도 보그 코리아와 처음 만난 것과 같이 SNS를 통해 기회를 잡았다.

"SNS에서 제 사진을 봤다며 미국 '영 블러드'라는 마더에이전시 대표님께서 직접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요. 저도 어디든 나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큰데 좋은 기회다 싶어 자연스럽게 해외 활동을 시도하게 됐어요."

마더에이전시는 일반 에이전시와 달리 전 세계 에이전시를 연결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작년과 올해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해 현지 에이전시와 미팅을 가졌다.

'재미있어 시작했다'는 모델 일이 해외 진출의 문턱에 와있는 셈이다. 어떤 매력이 모델 일을 지속하게 하는 것일까?

"촬영과정에서 새로운 메이크업을 하죠. 일종의 변신인데 매번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어?'하고 놀라요. 외적으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건 내면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새로운 옷을 입어보는 것도 재밌고요.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현장이기 때문에 정말 재밌어요. 촬영 콘셉트가 파도가 휘몰아치는 해변이라고 한다면 내가 파도가 돼야 해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죠."

■순간순간을 흡수하는 삶 '꿈은 이미 진행 중'

이쯤 이야기를 듣고 나니 '플레이어'의 공식질문을 할 차례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델 수야에게 꿈을 물었다.

"지금 꿈은 '재미있게 살고 싶다'예요. 현재 진행형인 셈이죠. 계속 탐구하고 움직이면서 살자는 게 꿈이에요. 그리고 그 순간들을 다 즐기고 흡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모든 순간들을 안고 가는 거죠."

주어진 순간순간에 집중해 살고 있다는 그녀지만 먼 장래에 꼭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저만의 베이커리를 열고 싶어요.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베이커리인데, 예를 들면 예약제로 운영을 하고 손님이 오시면 그때 기분에 따라 사연에 따라 상황에 맞는 그분만의 1인 디저트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도 집에서 만든 빵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즐긴다는 그녀는 학창시절 ‘엄마’역할을 자처 했다며 즐거워한다. 정작 본인은 몸매관리를 위해 먹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친구들을 챙겨주는 걸 좋아했어요. 시험기간에 친구들이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면 저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와서 친구들에게 나눠줬죠. 아직도 누군가를 챙겨주는 걸 많이 좋아하는 편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미술에 대한 애정도 잊지 않았다.

"꾸준히 미술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와 가장 가깝게 지냈고 어렸을 때부터 해서 없으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아요. 유일하게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매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미술을 통해서 뭐든지 다 될 수 있어요. 저의 일부분이죠."

■'달라도 괜찮아' 메시지 전하고파

모델로서 이루고 싶은 것을 묻자 다시 미국 진출이야기가 돌아왔다. 현지 에이전시 미팅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에는 동양인 모델을 잘 안 쓰기로 유명한 '생 로랑' 브랜드 쇼와 아직 한국인이 한 번도 서보지 못한 '빅토리아 시크릿' 런웨이에 서고 싶다는 답을 했는데 올해는 다른 대답을 내놨다고 했다.

"모델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달라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무엇이 달라도 괜찮다는 말일까.

"제 얼굴은 전형적인 동양인 얼굴이 아니에요.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눈도 뮬란처럼 쫙 째지거나 광대가 나온 것도 아니에요. 서양인이 생각하는 흔한 동양인 얼굴이 아니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달라도 괜찮다. 어쨌든 나는 나니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도 잘 가꿔서 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답을 했어요."

1년 사이 '어떤 자리에 서고 싶은 모델'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모델'이 목표가 된 그녀. 또 1년 뒤에는 어떤 모습과 생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델이 되어 있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가끔 상상합니다. 비디오가게 점원 타란티노를, 차고 안의 잡스를,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는 순간을요. 연습구장에서 땀 흘리는 메시를, 취재에 치이던 트웨인과 헤밍웨이를 만나는 건 또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저도 한 때는 예술에 삶을 걸겠다고 맹세했었지요. 어찌나 즐겁고 괴로웠는지, 얼마나 뜨겁고 슬펐던지를 기억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기획했습니다.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를요. '플레이어'라 이름붙인 이 길 위에서 애저녁에 떠나가버린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건은 오로지 셋입니다. 꿈이 있을 것,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 매력적일 것. 플레이어가 이름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필요한 곳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제 인생의 플레이어일, 제 삶 가운데 투쟁하고 있을 멋쟁이 꿈돌이들에게 이 인터뷰를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이 生을, 어디 한 번 살아내 봅시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플레이어>에서 더 깊은 인터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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