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절벽 넘을 필수 처방" vs "재정 바닥인데 현금 살포"

      2020.03.29 17:42   수정 : 2020.03.29 17:42기사원문
코로나19로 인한 실업대란이 현실화하면서 재난기본소득으로 취약계층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기업들의 채용이 올스톱되고, 고용지표를 끌어올렸던 공공일자리도 일시 정지했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과 단기취업자, 노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득절벽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으면서 재난기본소득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각 지방 고용노동청 등에 따르면 이달 들어 실업급여 신규 신청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0% 이상 늘었다. 코로나발 실업대란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취약계층 '고통의 계곡' 건너는 도구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민간 정책연구기관인 'LAB2050'의 윤형중 정책팀장이 '재난기본소득 검토해보자'는 내용의 칼럼을 한 언론사에 기고하면서 촉발됐다.

윤 팀장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이려면 자기 나름의 일을 잠시 멈추거나 최소화해야 하지만 생계 문제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며 "15조원으로 전 국민에게 30만원씩 지급할 수 있다. 개개인에겐 30만원이고, 가구원 수가 많을수록 지급액이 커져 부양비 감당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이후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지난달 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난기본소득을 한 달간 50만원이라도 지급해달라'는 글을 쓰면서 사회적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이 전 대표는 "경계에 서 있는 소상공인, 프리랜서, 비정규직, 학생, 실업자 1000만명에게 마스크를 살 수 있는, 집세를 낼 수 있는, 아이들을 챙길 수 있는,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는 소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불씨는 정치권으로 번졌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지난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전 대표를 언급하며 "이 정도 과감성 있는 대책이어야 우리 경제에 특효가 있을 것"이라고 동감했다. 다만 보편적 지원은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이다. 황 대표는 지난 22일 코로나19 피해 정도에 따라 차등지급하고, 재정이 아닌 40조원의 채권 발행을 통해 민간에서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이 "검토할 수 있다"고 화답하면서 이슈는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지자체가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도민 모두에게 1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뿌리기로 했다. 지급대상을 선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지급하는 것은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경기도가 처음이다.

■"기다릴 시간 없다" 지자체 先조치 행렬

경기도에 이어 서울시는 중위소득 100% 이하 약 118만가구에 최대 50만원을 지급한다. 전주, 광명, 이천, 여주, 김포, 양평, 군포, 의왕, 안양, 화성, 포천, 과천 등도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피해를 겪고 있는 다른 국가들도 특단의 조치를 시행 중이다. 미국의 상원 문턱을 넘은 슈퍼 경기부양책의 핵심은 재난수당이다. 성인 1인당 1200달러씩 지급된다. 부부에게는 합산해 2400달러가 나간다. 아동 1명당 500달러가 추가된다. 연 소득이 7만5000달러를 넘어가는 개인, 합산 연 소득이 15만달러를 넘어가는 부부에게는 더 적은 돈이 지급된다. 개인소득 9만9000달러, 부부 합산소득 19만8000달러 이상이면 아예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홍콩에서는 6월부터 모든 영주권자에게 1만홍콩달러(약 155만원)를 지급한다. 대만은 피해업종 종사자에게 경기부양 바우처로 404억대만달러(약 1조6700억원)를, 호주도 직업훈련생 12만명에게 13억호주달러(약 1조1000억원), 연금·실업급여 수급자 650만명에게 1인당 750호주달러(약 58만원)를 지원한다. 일본도 현금 지급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형 기본소득'의 밑그림이 구체화되고 있지만 동시에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책의 효과가 입증되지 않아 불분명한 데다가 재정지출도 큰 폭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다. 그럼에도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재난긴급생활비, 긴급생계자금, 재난기본소득 등의 이름으로 '유사 기본소득'을 우후죽순 도입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거리 두라면서 나가서 돈 쓰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24일 모든 도민에게 1인당 10만원씩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하자 장덕천 부천시장은 본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기본소득을 주는 이유는 소비를 늘려 소상공인의 매출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지속되는 한 소비패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배치되기도 한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잘되는 곳은 더 잘되고 안 되는 곳은 계속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장 시장의 지적대로 사람들의 모빌리티(이동)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일괄적 현금 지급은 소비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추경사업에서 상품권으로 소비쿠폰을 지급한 것도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실제 사용처가 없는 상태에서 돈을 푸는 엇박자 정책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 소비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문제다. 현금이든 상품권이든 소비를 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하는 상황과 모순되는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장 시장은 "재난상황에서 시급성이 요구되는 정책에는 보편적 복지가 더 좋을 것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며 하루 만에 입장을 선회했다. 경기도가 재난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시·군의 주민은 지급대상에서 빼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다.

■재정자립도·건전성 바닥인데 현금 살포?

우리나라는 지자체 재정자립도가 평균 45.2%로 낮다. 지난해 기준으로 10% 이하인 지자체가 5곳에 달했다. 결국 중앙정부에서 구멍 난 재정을 메워줘야 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미 코로나19에 대응한 추경 11조7000억원 중 10조3000억원을 적자국채로 충당키로 했다. 이에 따라 국가채무비율은 심리적 마지노선인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2차 추경도 기정사실화됐다. 홍 부총리는 "(재난기본소득은) 정부 재정여건을 고려하면 저로서는 선정, 선택하기 어려운 옵션"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기본소득 논의를 시작하거나 도입했다가 결국 재원 문제로 중단한 경우가 많다.

스위스는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 지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76.9%의 반대로 부결됐다. 막대한 비용을 부담할 구체적 재원조달 방식이 불투명했다는 점이 국민투표 부결의 주요 이유로 꼽힌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도 재정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본소득을 폐지했다.
지난 2017년 온타리오주는 온타리오주에 최소 1년 이상 거주한 18~64세 주민 중 연소득 3만4000캐나다달러인 미혼자나 4만8000달러 이하인 부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했다. 하지만 온타리오주는 불과 1년여 만에 "재정부담으로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유지할 수 없다"며 백기를 들었다.
이와 관련, 지난 2011년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냈던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은 "재난기본소득은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재정이 견딜 수 있는 수준 안에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ktop@fnnews.com 권승현 김경민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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