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
2020.09.14 18:14
수정 : 2020.09.14 18:14기사원문
오색테이프에 걸린 만국기는 살랑살랑 나부끼고, 학생들은 반별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응원을 한다. 운동장 한쪽엔 선생님들과 학부모 대표가 하얀 천막 아래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북소리와 함께 시작된 운동회는 기마전, 줄다리기, 이어달리기에 이어 박터뜨리기로 대미를 장식한다. 재빨리 펼친 쪽지에 '교감선생님과 달리기'라는 미션에 눈치보며 난감해하는 학생의 표정이 재밌다.
간신히 경계만 알 수 있는 운동장에서 먼지 날리게 달렸지만 골인 직전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나왔다. 어색하게 아빠와 함께 발목을 묶고 달리는 남학생도 눈에 선하다. 순위에 들면 부상은 대부분 공책이다. 장사하느라 부모님이 오시지 못해 풀이 죽어 혼자 도시락을 먹는 아이도 있었다. 가을걷이에 바쁜 할아버지, 할머니도 일손을 잠시 놓고 신나는 풍물놀이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엄한 선생님과 학생 간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체구는 작아도 아날로그 놀이로 단련된 학생들의 체력은 지금보다 좋았던 것 같다. 종합승부를 판가름짓는 박터뜨리기에서 이기려고 연신 모래주머니를 공중으로 던져대던 때가 엊그제 같다. 오래전 학교 나무를 자르는 바람에 운동회나 소풍 때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는 전설쯤은 학교마다 하나씩 다 있다.
저출산에 학생 수가 줄고 전국적으로 폐교가 늘면서 가을운동회는 추억의 한 장면이 돼 버렸다. 작년 말 기준 전국에서 폐교된 초·중·고는 3784곳에 달한다. 특히 코로나19가 덮친 뒤 아예 운동회는 씨가 말랐다. 일상을 바꿔 놓은 코로나19가 우리 추억까지 삼켜버렸다. 내년엔 가을운동회를 볼 수 있을까.
haeneni@fnnews.com 정인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