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가 돼줄게요" 배우로 살던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2020.10.27 16:41   수정 : 2020.12.24 10:46기사원문
"키튼, 네가 내 엄마가 되어 주어야겠구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나는 고작 열네 살이었고, 집에서는 8남매 중 첫째였다. 엄마가 별난 제안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꾸면서 영화관에 있을 내 미래를 열정적으로 그려보는 중이었다.



엄마 본인은 아주 멋진 엄마였다. 대단한 가정주부는 아니었지만 엄마는 웃음과 창의력이 가득했다.
마음속으로는 예술가였던 엄마는 아이오와주 더뷰크 변두리에 있던 산만한 우리 집 침실을 스튜디오로 바꿨다. 책장은 위대한 화가의 전기와 푸치니, 베르디, 벨리니, 베를리오즈의 수많은 오페라 테이프로 그득했다. 방에서는 광택제, 아크릴 도료, 커피 냄새가 났다. 해묵은 여행가방 위에는 붓, 유화물감, 파스텔 상자를 채운 유리용기가 있었다. 벽에는 엄마가 굴곡진 서체로 쓴 인용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예수회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영광을"이었다.

자연스럽게 엄마는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홉킨스를 택했다. 그의 신비스러운 면이 엄마의 매력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피정을 떠나 수녀원장인 콜럼바 수녀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답을 구했다. 엄마는 재치있고 쾌활했지만 그러다가도 얼굴에 넋나간 표정이 떠올랐는데, 마치 수백만 마일쯤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많은 면에서 격식을 갖추고 전통적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규칙을 생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키튼, 오늘은 영화 보러 가자"면서 오후 시간에 맞춰 날 학교에서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넌 캐서린 로스('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연) 같아. 단지 더 예쁠 뿐이지." 엄마의 말이었다.

나를 향한 엄마의 믿음이 없었다면 배우가 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부모였다면 내 꿈을 비웃거나 좀 더 현실적인 진로를 강요했겠지만, 엄마는 줄곧 격려해주었다. 연기학교 진학을 위해 뉴욕으로 옮길 기회가 왔을 때도 엄마는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다. 뉴욕에서 결정적 기회를 처음 잡은 것이 드라마 '라이언의 희망'이었다. 엄마는 종종 날 찾아왔고, 우리는 같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엄마는 정직, 품위, 끈기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입증된 견고한 가치를 철저히 가르쳤다. 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거짓말에 능하지 못하다. 내게 가장 강력한 동기와 기쁨은 일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성공의 열매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터였다.

때로는 싱크대에 서서 옥수수밭, 사과 과수원, 상록수, 성 프란체스코 동상을 내다보는 엄마의 모습을 부엌에서 우연히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면 엄마는 현재로 돌아왔지만, 나는 엄마가 어디에 갔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다.

우리 가족에게 큰 비극이 닥친 건 여동생 테시가 열두 살 나이에 암 진단을 받았을 때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엄마는 테시를 간호하며 동생 침실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7월 어느 더운 아침에 엄마는 창문을 열고 여동생이 세상을 뜨기 직전 몇 시간 동안 과수원에서 노래하는 새 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엄마가 죽어가는 딸에게 해준 마지막 일이었다. 장례식 후 엄마는 수도원으로 떠났고, 콜럼바 수녀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척하고 핏기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엄마는 전혀 예전 같지 않았다.

때로 엄마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면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다했다. 엄마를 다독이고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다 수년이 지나 내가 집을 떠나고 한참이 흐른 후에, 우리의 역할 바꾸기에 좀 더 진지해진 시간이 닥쳐왔다. '스타트렉:보이저' 시즌6의 막바지가 가까워져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고 있을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건너편에 있는 엄마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키튼,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천천히 하세요. 저 여기 있어요."

"경미한 뇌졸중이 몇 차례 지나간 것 같아. 침대에서 떨어졌고 안경이 깨졌어." 엄마의 목소리는 작고 머뭇거렸다.

"왜 뇌졸중이 몇 번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예닐곱 번 정도 뇌에 전기가 통한 기분이었는데… 그러다가 침대에서 떨어졌어."

"지금은 어떠세요?"

"벽지에서 뭔가 나온 것 같아. 거미였어…."

'거미'와 '환각'이라는 단어를 메모장에 휘갈기며 가능한 한 빨리 가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알츠하이머병을 떠올렸던가? 그렇게 극단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가? 상상력이 거기까지 뻗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더뷰크에 계속 살고 있던 막내 남동생 샘에게 전화를 걸었고, 동생은 시내에서 가장 뛰어난 신경과 의사와 진료 약속을 잡았다.

진료실에서 의사는 질문 몇 개를 던졌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올해가 몇 년도죠? 대통령은 누구죠? 어느 순간 엄마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는데, 거기에는 펜으로 적어둔 메모가 있었다.

"커닝 페이퍼인가요, 존?"

의사의 질문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신경과 의사를 한 수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우리 엄마였다. 웃음이 잦아들자 의사가 계속했다. 그는 질문이 끝날 때쯤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우리 셋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존, 당신은 알츠하이머병 초기일 확률이 매우 높아 보여요."

그는 의사들도 아직 알츠하이머병의 정확한 특징이나 진행 양상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정확히 진단하기는 아주 어려웠지만, 의사는 경험상 엄마가 '정형적이지 않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고 확신했다. 병이 주로 공격한 부분은 해마가 아니라 다른 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환각이 나타난 거였다.

그날 밤 미트로프와 으깬 감자로 저녁을 들고 난 후에 엄마에게 목욕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나는 욕조에 목욕소금을 넣었다. 엄마가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고, 나는 엄마가 믿을 만한 사람을 간병도우미로 둬서 엄마를 보살피고 엄마에게 가장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꺼냈다. 엄마는 가슴팍까지 무릎을 모아서 그 위에 볼을 기댔는데, 마치 어린 소녀 같았다. 두 손을 물에 담그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야."

나였다. 변호사를 불러 서류를 작성하게 했고, 모두 끝났다. 우리 모녀 사이에서 농담 같았던 작은 비밀이 이제는 모두 사실이 되었다.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서 돌보게 될 터였다.

알츠하이머병 모임에서는 진단과 사망 사이의 기간을 '오랜 작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마는 '아주 오랜 작별'의 초기에 들어선 셈이었고, 9년 동안 엄마가 쇠약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한번은 엄마를 모시고 산책하러 나갔다. 엄마가 길을 따라서 새로이 짓고 있는 집들을 보고 싶다고 부탁했는데, 엄마의 타고난 호기심이 기민하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에 슬픈 시선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기억한 넋나간 표정이 떠오르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다. 엄마의 성격이 확실히 드러났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엄마는 침대에 틀어박혔고, 그즈음 기억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엄마가 나를 알고 엄마를 돌보겠다는 내 약속도 기억한다고 믿어야 했지만, 임종이 가까워졌을 땐 또 다른 엄마였던 콜럼바 수녀님을 불렀다. 그분은 나보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가운과 성의(聖衣)를 입고 띠를 두른 수녀님은 엄마의 침대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존, 이제 당신은 쉴 때가 됐어요. 먹고 마시는 걸 그만뒀으니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거죠. 그저 생각해 봐요.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얘기해온 걸 보겠죠. 하나님을 만나고 평생 간절히 이해하고 싶던 바를 깨달을 거예요. 그러니 더는 걱정하지 말아요. 아들딸들은 여기 있고, 엄마가 쉬길 바라요. 그들은 이제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엄마가 알길 바란답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성 프란체스코 동상 너머를 바라보던 엄마의 모습을 내가 우연히 본 그 옛날부터 찾던 바를 엄마는 마침내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샘이 디자인하고, 트라피스트 가톨릭수도회 수사들이 손으로 만든 관에 누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랑하는 이가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대변인이 되었다. 알츠하이머병 핵심 연구를 진행하는 미네소타대학의 신경학 교수 카렌 애시와 친구가 됐다. 우리는 더디지만 조금씩 더 알아 가는 중이다. 나는 내가 베풀 수 있는 바를 내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설득한다. 그래야 치료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이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면 누구든 협력단체에 들라고 권한다. 알츠하이머협회는 전국에서 단체 모임을 진행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고 이야기를 공유하며 치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더 큰 간병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은 중요하다. 어떤 간병인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 나도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보여드리고 엄마가 내게 준 것과 그밖의 더 많은 걸 되돌려드릴 기회가 있었기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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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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