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잘못 타면 감옥 간다
2021.02.13 12:08
수정 : 2021.02.13 21:41기사원문
정권 바뀔 때마다 물갈이 악습
까닥 잘못하면 직권남용 걸려
기득권자 지대추구와 닮은꼴
오랜 불법 관행에 철퇴 내린
서울중앙지법 결정은 명판결
[파이낸셜뉴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9일 법정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은 김 전 장관에게 2년6개월 중형을 선고했다. 문재인정부에서 장관급이 유죄를 선고 받고 옥에 갇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김 전 장관으로선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정권 바뀌고 산하기관장 바꾸는 건 오랜 관행이다. 그런데 법원은 이 관행을 불법으로 봤다. 임기가 남은 산하기관장한테 빨리 그만 두라고 윽박지르는 걸 직권남용으로 판단했다. 법원은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더 이상 봐주지 않았다.
청와대는 김은경 사건이 블랙리스트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블랙리스트인지 단순 체크리스트인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좁게 보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는 청와대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박근혜정부는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로 곤욕을 치렀다. 이때 블랙리스트는 특정 사안에서 특정인을 빼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 행사에 특정 인사를 참석자 명단에서 빼면 블랙리스트다. 예산이 들어가는 국가 문화 프로젝트에서 특정인을 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넓게 보면 블랙리스트는 쫓아내야 할 사람, 살생부를 포함한다. 정권을 잡은 뒤 이 사람은 같이 갈 수 없다고 X표를 그면 이 또한 블랙리스트다.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없는 공공기관장 명단을 작성한 뒤 사표를 내라고 종용한 걸 두고 야당과 언론이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하는 건 당연하다.
◇뿌리를 캐면 낙하산에 닿는다
블랙리스트 논란은 결국 낙하산에 닿는다. 자기 편한테 자리를 마련해 주려다 사달이 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은경 사건의 본질은 낙하산이다. 낙하산은 지대추구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화제의 책 '불평등의 세대'에서 지대추구 행위를 "생산성이 떨어지는 특정 세력 혹은 주체가 국가의 특정부문이나 자리를 점유하거나 점유한 자와의 네트워킹을 통해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활동 없이 기존의 부와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확장시키는 활동"으로 규정한다. 낙하산이 꼭 그렇지 아니한가. 지대추구 행위가 만연하면 "그 자리와 자원을 보다 잘 이용했어야 할 선의의 경쟁자들이 도태되면서, 자원 할당이 왜곡되고 불평등이 증가하며 국민 경제가 후퇴하게 된다." 이 또한 낙하산을 닮았다.
대선철이 되면 유력후보들은 대형 캠프를 꾸린다. 정계, 학계, 관계, 법조계, 언론계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자기가 민 후보가 당선되면 나중에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다. 충성심은 자리에서 나온다. 이론의 여지 없다.
역대 어느 정부도 낙하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낙하산 부대원의 출신 성분이 다를 뿐이다. 박정희ㆍ전두환 군사정부 아래선 군인들이 득세했다. 별 달고 전역하면 한자리씩 나눠주었다. 역시 공기업 사장, 이사장이 제일 만만했고 외국 대사로 나가는 군인도 꽤 많았다. 이때만 해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낙하산 논란도 거의 없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다.
민주화 이후엔 군인 자리를 정치인이 꿰찼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엔 인사 청탁하면 패가망신한다고 겁을 주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5년 내내 코드인사 비판에 시달렸다. 나중에 노 대통령은 말했다. "코드인사라고 하는데, 그것은 책임 정치의 당연한 원칙이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고요." 이어 "이(낙하산) 인사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요,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계속 잘못된 것으로 이야기하면 국가 운영이 매우 어렵죠"라고 말했다(2006년 8월 방송의날 KBS 특별회견). 참 솔직해서 좋다. 국가 운영이 어렵다는 말에 주목하자.
이명박정부 출범 초기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산하기관장들과 마찰을 빚었다. 유 장관은 문화계 원로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노무현정부에서 임명된 이들은 자리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당시 민예총은 "완장 찬 신종 홍위병"이라며 유 장관을 비판했을 정도다. 이번에 법정구속된 김은경 전 장관 입장에선 "왜 나만…“이란 탄식이 절로 나올 법도 하다.
사실 문재인정부가 투하한 낙하산은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을 정도는 아니다. 투하는 했지만 그냥 예전만큼 했을 뿐이다. 심지어 종종 절제의 미덕을 보인 적도 있다. 민간 상장기업인 포스코, KT는 건드리지 않았다. 두 회사는 계열사만 수십 개에 이른다. 꼭대기에 자기 편을 심으면 세컨더리 낙하산을 적어도 수십 개는 내려 보낼 수 있지만 간섭하지 않았다. 금융지주 회장의 잇단 연임을 꾹 참고 지켜본 것도 평가할 만하다. 이명박정부 때 금융계는 이른바 4대천왕이 지배했다. 문 정부에 금융계 천왕은 없다.
◇미국엔 엽관제
엽관제는 미국판 낙하산이다. 엽관(獵官)의 엽은 엽총의 엽자다. 관직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엽관제를 흔히 영어로 스포일즈 시스템(Spoils System)이라고 한다. 스포일즈는 전쟁에서 얻은 노획품, 곧 전리품을 뜻한다. 선거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가 전리품을 배분하듯 관직을 배분한다는 얘기다.
19세기 초반 앤드류 잭슨 대통령(재임 1829~1837) 때 엽관제가 성행했다. 서민 출신인 잭슨 대통령은 공직을 일부 엘리트가 독점하는 것을 마땅찮게 여겼다. 그래서 공직을 대폭 개방했다. 뜻은 좋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엽관제를 낳았다. 잭슨의 친인척 다수가 공직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당시엔 우체국장 자리가 인기였는데, 우체국장 수천 명이 한꺼번에 바뀌었다는 기록도 있다.
엽관제에 질린 미 의회는 1883년 펜들턴공직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발의자인 조지 펜들턴 상원의원의 이름을 땄다. 정치인 연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발하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 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렇다고 엽관제 관행이 싹 사라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공직의 수만 수천 개에 이른다. 아무리 현미경을 들이대도 일일이 체크할 수 없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능력보다 충성을 공직자 선발 기준으로 삼았다. 친인척을 공직에 등용한 케이스도 부지기수다. 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큐슈너는 각각 백악관 선임보좌관직을 맡았다. 온 가족이 대선 전리품을 나눠 먹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한국은 관피아 방지법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했다. 온 나라가 들끓는 가운데 민관유착에 따른 부실한 안전점검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해양수산부 출신 전직 관료들이 산하기관 고위직을 꿰찼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해수부와 마피아를 합성한 해피아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그해 12월 관피아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확히 말하면 공직자윤리법 개정안(17조)이다. 고위직 관료의 퇴직 후 취업 제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업무관련성은 부서에서 기관으로 확대한 게 골자다. 그래서 관피아가 사라졌을까. 턱도 없다.
관피아 방지법은 여전히 구멍이 숭숭 뚫렸다. 공직자윤리법 17조는 깐깐한 듯 보이지만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승인을 받으면 언제든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 덕에 관피아의 원조 격인 모피아는 건재하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의 영문표기 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의 합성어다. 더불어 금융위원회ㆍ금융감독원은 금피아 철옹성을 구축했다. 금융 관련 국책은행, 공기업, 협회 수장 자리는 모피아ㆍ금피아 등쌀에 감히 정치인도 넘보지 못한다.
게다가 정치인 또는 캠프 출신 인사는 아예 관피아 방지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여야를 떠나 국회의원들은 안다. 낙하산은 정권을 떠받치는 필요악이란 것을.
◇낙하산, 해법은 뭔가
무조건 낙하산은 안 된다고 비판하는 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법을 더 세게 조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승자독식의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서 낙하산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게 슬기로운 낙하산 대처법이 아닐까 한다.
먼저 상장기업은 건드리지 말자. 공기업에서 민영화한 기업, 정부 지분이 1주도 없는 기업은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이다. 상장사가 경영자를 어떻게 구성할지는 주주들에 맡기자. 포스코, KT, KB국민ㆍ신한ㆍ하나금융지주의 경영은 자율에 맡기는 게 국익에 플러스다.
그럼 국책 기업은행은 어떻게 하나. 기업은행은 코스피 상장사이지만 아직 기재부가 지분 절반 이상을 가진 최대주주다. 문 정부는 행장에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보냈다. 윤 행장은 기재부 출신이다. 난 이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주주가 최고다.
비상장 공공기관, 공기업은 연봉과 명예를 동시에 보장하는 알짜다. 정권이 탐을 낼 만 하다. 다만 캠프 출신을 보내더라도 현직 임기는 보장하자. 그게 그나마 공공기관, 공기업을 덜 망가뜨린다. 전 정권 인사라고 임기 만료 전에 밀어내면 꼭 사달이 난다. 이명박정부가 쫓아낸 문화계 원로들은 나중에 소송을 걸어 이겼다. 김은경 전 장관도 박근혜정부 사람들을 임기 만료 전에 사표를 받으려다 부메랑을 맞았다.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보은성 엉뚱한 인물은 피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관광공사, 적십자사 고위직에 업무와 무관한 인물을 보냈다. 누가 봐도 보은성 코드 인사였다. 그때 "이게 뭐지?"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식의 인사는 두고두고 정권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무자격 낙하산 투하는 넓게 보면 채용비리다.
◇1심 판결은 명판결
이런 원칙을 정치인들의 양심에 맡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제 편을 챙기는 낙하산은 고래심줄처럼 질기다. 그래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1부가 내린 판결이 중요하다. 여차하면 잡혀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1심 판결이라 2,3심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무절제한 낙하산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1심 결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앞으론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함부로 공공기관 임원을 몰아내지 못한다. 단박 직권남용 혐의에 걸리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내정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무자격자를 밀어주다간 채용비리에 걸릴 수도 있다.
일각에선 재판부가 최근 판사 탄핵에 불만을 품고 보복성 선고를 내린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얄팍한 정치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선고는 3명의 베테랑 부장판사(김선희 임정엽 권성수)로 이뤄진 경력대등재판부에서 내려졌다. 3인 부장판사의 합의라 더 무게감이 있다. 불법 낙하산 관행에 철퇴를 내린 이번 1심 선고는 길이 남을 명판결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