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글빨’ 좋으면 형량 준다?...피해자 용서 빠진 ‘맹탕’ 감형 전략

      2021.04.05 05:00   수정 : 2021.04.05 04:59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받은 ‘구급차 가로막은 택시기사’ 최모씨는 총 16번의 반성문을 제출한 덕에 지난달 12일 2심에서 2개월 감형된 1년10개월을 선고받았다. 심지어 유족에게는 일언반구 사과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 피해자 아들은 “가해자에게 연락 한번 없었다.

반성문 제출했다는데 무엇을 반성하는지 모르겠다”고 분노했다.

#. 대낮에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 가로등을 들이받아 6세 아이를 숨지게 한 운전자는 지난 1월 12일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검찰이 구형한 10년에서 2년이 빠졌다. 유족들은 “ 반성문을 쓰고자동차 보험에 가입됐다고 형량을 낮춰주는 게 말이 되나”라고 울분을 토했다.

#.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은 100장 넘는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결국 조주빈은 도합 4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이 감형 요소라는 사실을 인지한 그의 이 같은 시도 자체가 피해자들을 마음 졸이게 했다.

반성문을 많이, 또 잘 쓰는 게 감형 요소로 작용한다는 데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앞선 사례들과 같이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 아닌 재판부를 향한 호소만으로 형이 감해지거나,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반성문, 큰 요소 아냐” vs “의심 사례 계속 나와”
실제 다량·고품질의 반성문 제출이 감형에 도움이 될까.

5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양형기준표상 감경요소로 ‘진지한 반성’이 명시돼있다. 재판에 임하는 피고인의 태도, 법정 진술의 일관성, 답변의 성실성 등과 함께 반성문 제출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반성문이 양형 판단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재판부는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후의 처사, 피해 정도 등 다양한 사정을 고려하는데 반성문 제출로 판단할 수 있는 반성 여부 자체도 그 중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여중생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해 기소됐던 ‘제2의 n번방’ 운영자 배모군(19)은 133회에 걸쳐 반성문을 냈으나 1심에서 받은 장기10년·단기5년 판결이 그대로 최종심에서 확정됐다.

또 판사의 “(반성문) 다시 써오라”는 말도 ‘필력을 발휘해 작성해라’는 의미보다는 ‘반성 여부’를 재차 따져 묻는 의도라는 의견도 덧붙는다.

하지만 반성문을 제출한 피고인들의 형량이 구형보다 줄거나, 2심·대법원 판결에서 감형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반성문이 양형 판단의 주요 요소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상존한다.

딸 친구를 성추행하고 살해한 일명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낮춰졌는데, 그 사이 40차례 넘는 반성문 제출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심 재판부였던 서울고법 형사9부는 “(이영학이) 재판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잘못을 인식해 시정하려 하고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형사재판에서의 항소심 파기율이 2015년부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30%를 넘고 있다는 점도 이 주장에 힘을 싣는다. 대부분 원심 파기는 ‘양형부당’이 인정되는 경우 이뤄지는데, 판사가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납득하면 이를 받아들여준다.

2020 사법연감을 살펴보면, 2015년 37.3%(2만7820건)였던 파기율은 2016년 33.6%(2만6578건), 2017년 31.3%(2만5848건)로 다소 낮아졌다가 2018년 32.2%(2만4520건), 2019년 34.6%(2만4148건)로 반등했다.

버젓한 ‘반성문 대필’ 광고..“감형 사유서 빼야”
‘변호사 자문, 10만원, 12시간 이내 작업 가능’, ‘A4용지 3~4장 5만원’
포털에 ‘반성문 대필’이라고만 검색해도 줄을 잇는 대행 전문 업체와 로펌의 홍보 글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블로그는 더욱 가관이다. 올바른 반성문 작성법을 자세하게 써놓는가 하면, “판사에게 와 닿는 구체적 표현을 사용해라”는 등 감성을 자극하는 문체를 사용하라고 제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서류 작성을 전문으로 하는 행정사에게 맡겨보라는 충고도 있다.

결국 법원이 반성문 제출을 감형 요소로 다루면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돈을 주고 반성문을 잘 쓰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에 대해 류재율 변호사는 “실제 형사재판에서 반성문 제출이 결정적 감형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만 문제는 피해자나 일반 시민들에게 그렇게 비친다는 점”이라며 “반성문 대필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성연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도 지난해 10월 21일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토론회에서 “반성문 제출이 감형 전략으로 쓰이고 작성을 대행하는 업체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진지한 반성’을 어떻게 측량할 것인가”라고 반문한 바 있다.

이에 반성 여부 판단에서 ‘반성문’을 아예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지를 얻고 있다. 류 변호사는 “양형기준표상 감형요소인 ‘진지한 반성’ 항목에 ‘반성문 제출은 제외한다’는 단서 조항을 추가한다면 (형량이 낮춰진다고 해도) 판결의 신뢰성을 높이고, 피해자나 유족 측도 괜한 오해를 하지 않는 구조가 마련될 수 있다”고 짚었다.

이 같은 조처가 이뤄지면 피의자를 강제로라도 반성문보다는 피해자와의 ‘합의’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적어도 감형의 조건은 ‘재판부에의 호소’가 아닌 ‘피해자의 용서’가 돼야 한다는 뜻에 따른 것이다. 이영학 판결 소식을 접한 시민 김모씨(26)는 “아무런 상관없는 판사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용서는 피해자에게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taeil0808@fnnews.com 김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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