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아요, 소녀여

      2021.06.11 04:00   수정 : 2021.06.11 04: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충주(충북)=조용철 기자】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충주를 찾았다. 충주는 예로부터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의 고장으로 음악가 우륵, 대문장가 강수, 명필 김생 등을 배출했다. 이들은 이 고장의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그 뿐만 아니다. 임진왜란 중 탄금대 전투에서 활약한 신립, 병자호란 당시 활약했던 임경업 등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지역이다. 땅이 기름지고 교통 중심지여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세 나라가 서로 충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세력을 다퉜다.


■수만가지 이야기를 품은 탄금대

탄금대공원 입구에는 탄금대사연노래비가 우뚝 서 있다. 1968년 발표된 탄금대사연노래는 신립 장군과 우륵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맨발숲길을 걸으면 상쾌한 나무 내음이 향기롭다. 맑은 공기와 함께 걷다보면 숲길 곳곳에 있는 조각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탄금대라는 명칭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데서 유래됐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8000여명의 병사들과 배수진을 친 후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옛 전쟁터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달천과 남한강의 합수머리에 위치해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특히 열두대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절경을 이룬다.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태극기와 탑 하나가 보인다. 충혼탑이다. 1955년 대한민국상이군경용사회 충북 충주분회와 재향군인회에서 광복 이후 전사한 충주·중원 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무원, 군노무자 2838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탑을 세웠다. 2004년 5월 충주시에서 호국 영령의 위폐 봉안실을 세웠고 그 위에 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이후 호국영령의 위폐가 추가돼 2910위의 위폐가 봉안돼 있었으나 2014년 이중봉안 위폐를 정비해 현재 1920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곳에서 향사(享祀)를 지낸다.

조금 더 가다보면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과 만난다.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은 1592년 4월 도순변사 신립이 휘하 장병 8000여명과 함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적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탑 상단에 형상화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하고, 아래 부분의 신립 장군과 4인의 군상은 죽음으로써 국토를 지키는 불굴의 충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 바위와 바닥 부분의 원반 모양은 탄금대를 싸고 도는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 모양을 살려 만들었으며 탑 뒷부분의 부조는 당시 탄금대 전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에 새겨진 동요도 눈길이 간다. 1937년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권 시인은 평소 일본인들의 부당행위에 불만을 가지다가 항일운동에 나서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했다. 그후 재일유학생들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9년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됐다. 형무소에서 폐결핵을 얻어 1940년 6월 출옥한 뒤 귀국해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악화돼 고향인 충주로 내려와 야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란 중 약을 구하지 못해 1951년 별세했다. 권 시인이 남긴 대부분의 시가 애국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감자꽃'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맞선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윤석중 선생 등의 후원으로 1968년 5월 이 위치에 감자꽃 노래비를 세웠다. 계단을 한참 올라오면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을 재현하기 위해 지어진 탄금정과 만난다.

탄금대에서 열두대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 많다. 계단 아래로 가면 신립 장군이 자결했던 열두대가 있다. 열두대는 전투 당시 뜨거워진 활을 식히기 위해 강 아래로 열 두번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평화의소녀상과 달천강 수주팔봉

탄금대를 뒤로 한 채 충주 성내동 문화의 거리로 향했다. 충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보기 위해서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 조형물이다. 1920~40년대 조선 소녀들의 일반적인 외모를 가진 단발머리 소녀로 의자 위에 주먹을 쥔 채 맨발로 앉아 있다.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고 한다.

지난 2011년 12월 충주 성내동 문화의 거리에 세워진 충주 평화의 소녀상은 전쟁의 아픔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새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충주 평화의 소녀상을 지나면 바로 인근에 충주읍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됐던 충주읍성은 거의 방치돼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해 1869년 개축했다. 충주읍성은 1896년 유인석 의병의 충주성 전투중 북문을 제외한 3개문과 서문 수문청을 제외한 3개의 수문청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저항 의지를 분쇄하려고 했는데 그 시작이 서울 도성과 각 지역의 읍성을 철거하는 것이었다. 이는 읍성이 가지고 있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천강이 빚어 놓은 경관 중 가장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치가 탁월한 수주팔봉도 충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속리산 부근에서 발원해 괴산을 거쳐 충주의 서쪽을 지나며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달천강은 예로부터 물맛이 좋고 달다하여 달래강이라고도 부른다. 수주팔봉은 물이 두루 돌아가고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있다는 뜻으로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의 산을 바라볼 때 정상에서 강기슭까지 달천 위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떠오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세는 야트막하지만 날카로운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위세가 옹골차고 당당하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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