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분석) 닮아 있는 러시아와 북한의 '회색지대 전략'
2022.02.23 15:46
수정 : 2022.02.23 23:36기사원문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의 구사는 상대방이 전략의 의도·동기 자체를 모호하고 헛갈리게 한다.
‘회색지대전략’은 일종의 속임수다. 하지만 본래 전쟁에서 전략 전술의 본질은 위계(a deceptive plan)다.
불법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힘은 곧 정의인 국제 사회에선 심판도 경찰도 없다. 국익이 최고의 가치이자 선(善)인 것이다. 이에 국가이익은 오직 과정보다는 결과를 가지고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회색지대전략에 관련해선 오직 유용성을 거론할 뿐 불법성이나 비도덕성 등은 거론되지 않는다.
또한 회색지대전략과 관련해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전략에 대한 마땅한 대응전략의 모색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을 느끼지 못하도록 임계점까지 적에게 아주 조금씩(Slicing) 주입하는 방식, 급소에 칼날을 아주 조금씩 밀어 넣는 식이다. 의도와 목적을 간파했을 땐 사전 대응책이 없으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회색지대전략은 야금야금 ‘기정사실화(fait accompli)'해 상대의 적절한 반응이나 대응을 못 하도록 옮아 메는 전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러, 우크라 동부 돈바스 내 친러 2개 공화국 '주권 승인' 형식 군대 진입...크림반도 병합 때보다 고도화 '회색지대' 전략
러시아가 최근 우크라이나 공세를 가하는 가운데 21일에는 돈바스 지역 내 친러 2개 공화국에 대한 주권 승인 후 러시아군까지 진입시키면서 회색지대전략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북한이 대한민국에 구사하는 전략과 본질에서 닮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길주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안보연구센터장은 "회색지대는 대규모 전투가 치러지는 ‘전쟁’의 국면도 아니지만 온전한 ‘평화’하고도 거리가 먼 ‘모호한 중간지대’의 속성을 역이용하는 전략→공세→강압 차원에서 분석되는 개념"이라며 "이번 러시아군의 돈바스 지역 진입은 ’크림반도 합병'을 한 당시보다 더 정교화된 회색지대전략 공세의 속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군사력을 직접적 동원해 싸우지 않고 크림반도 내 친러시아계 주민을 포섭한 후 ‘러시아 귀속’ 찬성에 투표하도록 종용하는 방식으로 전형적인 '회색지대전략'을 활용한 바 있다.
반 센터장은 "이번에도 러시아는 동부 돈바스 지역 내 친러시아 세력이 세운 자칭 독립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뒤 러시아군의 진입을 명령했다"며 "돈바스 지역을 무력공격이 아닌 ‘주권 승인’이라는 방식을 채택, 역내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군대를 진입시켰다"고 설명했다.
크림반도 합병 때와 유사한 '회색지대전략'을 구사해 '민스크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단독으로 이러한 결정을 할 권한이 없음에도 자연스레 권한을 행사하는 구도를 만드는 전법을 사용한 셈이라는 해석이다.
이어 반 센터장은 "러시아는 군사력을 투입하면서도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회색지대 공세를 펼치고 있다"며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으로 자군을 진입시키면서 자신을 '평화유지군'이라고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우호·협력·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 체결 이전까지 자신이 평화유지군으로 활동을 하겠다는 여론전·심리전·법률전이 포함된 회색지대 공세의 전형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민스크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준수하지 않아 이제 종료됐다"고 선언했다고 22일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민스크 협정'은 친러 분리주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군 간의 돈바스 지역 '교전 중단을 위한 협정'으로 2014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중재로 맺은 정전 협정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아, 지난 8년간 약 1만4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올 7차례 미사일 도발, 한·미의 적극적 군사 대응 회피 핵 완성 고도화 달성.. 고도화된 '회색지대' 전략 구사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10월 11일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 기념연설에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며 "그 누구도 다칠 수 없는 무적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계속 강화해 나가는 것은 우리 당의 드팀 없는 최중대 정책이고 목표이며 드팀 없는 의지”라고 말했다고 다음날인 12일 노동신문이 보도한 바 있다.
그러면서 북한은 올 초 1월에만 7차례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북한이 한·미의 적극적인 군사 대응 위험은 회피하면서 자신의 핵 완성·핵 고도화라는 이익 달성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미는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북한은 협상의 레버리지 확보를 위한 유엔 제재 완화, 한미·미일 연합훈련 중단 및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 동맹의 균열 조장을 통한 한반도의 제한된 현상타파를 지속해서 시행하고 있으며, 미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통해 이를 지속해서 시도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 북한과의 대화와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각 정부의 중요한 정치적 성과로 내세우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공약을 함으로써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큰 정치적 비용이 발생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 때문에 두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조심스러운 대응과 연합훈련은 실기동(FTX) 없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대치해 동맹 간의 갈등을 빚는 듯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가 평화유지군을 빙자해 돈바스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러시아의 회색지대 공세 묵인 하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회색지대 공세를 ‘흑백지대’로 상쇄, 전환하는 미국과 나토의 대응 의지와 역량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서방세력, 미국과 나토가 대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중국과 북한도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동북아·한반도에서 도발 수위를 한층 높여 한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북한은 역사적·전통적으로 전 세계에서 회색지대전략의 구사에서 가장 뛰어난 집단으로 상황에 따라 시기를 조절하며 한반도에서 모라토리엄 파기, 레드라인을 넘는 ICMB 혹은 MRBM·SRBM·SLBM 등 고·중강도 혹은 중·저강도 도발을 옵션으로 상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한·미 동맹이 북한의 '회색지대 전략'을 통한 한반도 병합 시도를 막으려면 명확한 공통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한 임계점의 설정과 대응을 위한 억지 위협 이행이 필요하며 그에 따른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해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美 CSIS 부국장 "北 한국 초기 생화학무기 제압 미·일 참전 저지 실전 능력 구현" MRV 초기요격 방어망 구축 시급
22일 미국의소리(VOA)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언 윌리엄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미사일 방어 프로젝트 부국장은 북한이 잇따라 발사한 미사일은 "한국을 생화학무기로 초기에 제압하고 미·일 양국의 참전을 저지하는 실전 능력을 구현했다"고 밝혔다
이언 부국장은 "이 정도 수준의 미사일 시험은 오랫동안 본 적이 없는 만큼 뭔가 일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첫 번째와 두 번째 발사한 탄도미사일은 ‘기동식 재진입체(MRV, Maneuvering Reentry Vehicle)’로 북한이 꾸준히 연구해 왔고 시험해 보려던 종류다"라며 "실제로 북한 주장 ‘극초음속(마하 5 이상)’ 미사일은 비행시간 대부분을 탄도미사일처럼 날았고 마지막 순간 기동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MARV"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언 부국장은 일본도 ‘극초음속’ 미사일 사거리를 500km로 분석했지만 이후 북한은 700km를 비행했다고 발표한 것은 "발사 후반 부분에서 미사일이 기동하면서 아래로 떨어지자 레이더에서 놓쳤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건 대수롭지 않은 진전이 아닌, 방어 요격을 훨씬 어렵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북한의 MRV는 "극초음속 무기와 탄도미사일 사이에 존재하는 영역일 것"으로 평가하고 "북한 후방 깊숙한 곳에서 쏘지 않는 한 서울 타격용으론 사거리가 다소 길어 한국의 더 남쪽 지역들, 혹은 잠재적으로는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언 부국장은 "요격과 방어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는 속도보다는 낮은 고도이며 비행 후반부에 나타나는 약간의 변칙 기동 능력"이라며 "북한이 동해 쪽으로 발사한 이런 미사일이 비스듬히 선회하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포대 우회가 가능해 남북한 접경 지역이 아니라 한국 영토의 남쪽 깊숙한 곳을 타격하기 위한 무기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MRV는 남쪽의 미군 부대들을 노리며 전쟁 발발 전, 미군 병력이 해상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산처럼 넓은 지역, 일본의 주일 미군 후속 보급 기지와 동해상 진입하는 미 해군 항공모함 등을 겨냥하는 임무도 띠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언 부국장은 다만 "북한 MRV는 비행 가장 마지막 구간에서만 변칙 기동을 하고, 더 많이 기동할수록 사거리는 짧아져 대기 중으로 진입한 미사일은 자체 동력이 없어 선회 시 항력에 따라 속도가 느려지므로 사드 포대를 완전히 우회하기를 어렵다"며 "사드는 측면 공격 방어 능력이 어느 정도 있어 한 번의 요격 기회는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특히, 해상 기반 능력 이지스함을 확보한 상태라면 북한 미사일이 변칙 기동을 시작하기 전에 SM-3 미사일로 요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와 군 당국은 "북한 미사일이 더 ‘이상한 짓(monkey business)’을 할수록, 이 미사일이 더 황당하게 움직이기 전에 초기 요격이 가능한 미사일 방어망을 갖추고 있는 것과 탐지만 가능한 것과는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생사가 갈리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재고하고 시급히 이러한 능력을 갖춰야 할 것으로 보인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