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3인 헌신 메아리, 양주 광적면 만세배미

      2022.03.01 23:01   수정 : 2022.03.01 23:01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양주=강근주 기자】 양주시 광적면 만세배미는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1919년 3월28일 열사 3명이 일제에 저항하며 만세운동을 벌이다 이곳에서 순국했다. 양주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 및 재연행사를 거행하며 순국선열 헌신과 희생과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양주 만세독립운동은 3월1일보다 좀 늦게 일어났다. 역사적 그날, 광적면 만세 시위는 면소재지인 가납리에서 일어났다. 가납리에는 3월 초부터 만세운동 소식이 전달됐고 만세 시위를 추동하는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만세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됐다. 광적면 만세 시위는 당시 양주군내 만세 시위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다.

당시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던 인사는 효촌리 출신 김진성-백남식-이용화 등이다.
이들은 광적면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장고개를 넘어 광적면 가납리에 도착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가납리에는 광적-백석면 주민이 모여 만세를 부른 뒤 해산하고 있었다. 효촌리 시위대가 도착하자 흩어졌던 시위대원이 다시 모였고, 시위대 수는 950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논 가운데(현 가납리 732-4, 이날 시위 이후 이곳을 ‘만세배미’라고 부른다)에 모여 오후 4시경 시위를 재개했다.

만세 시위가 전개되자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 5명과 보조원 노호연, 광적면장 이하용이 도착했다. 헌병이 논둑 위에서 주모자를 찾자, 이용화를 필두로 김우규-한춘석이 앞으로 나섰다. 헌병이 군중 해산을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를 외쳤고 헌병은 깃발 든 쪽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결국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김진성-이용화-백남식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일본 헌병 발포로 시위대원 가운데 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는 시작 2시간만인 오후 6시경 끝났다.


당시 만세 시위 현장이던 가납리 732-4번지 일대는 현재도 ‘만세배미(만세답)’로 불리고 있다. 양주시는 1986년 6월 가래비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고 매년 3월1일 추념식 및 추모제향을 봉행했다.
그리고 2007년 당시 순국열사들이 실제로 만세운동을 했던 만세배미 현장에 순국기념비를 제막하고 일제에 대항해 만세 시위를 벌이다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한 김진성-이용화-백남식 열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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