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째 옷도 못갈아 입었어요" 이재민들의 삶, 또다른 고통이었다
2022.08.17 05:00
수정 : 2022.08.17 10:32기사원문
#. "일주일째 옷도 못갈아 입고 출근하고 있습니다. 옷이 다 집안에 있어요." "지병을 앓고계신 고령의 노인 분들이 혹시 코로나19에 감염될까봐 걱정입니다."
[파이낸셜뉴스]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에 옹벽이 무너진 서울 동작구 극동아파트 주민 고모씨(25·여)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이재민 대피소에 머물며 각자 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고씨 가족은 무엇보다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걱정이다. 잠자리, 화장실 이용 등 대피소 생활이 고령의 할머니에겐 고역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여러사람이 한 군데 모여있다 보니 최근 재유행 조짐을 보이는 코로나19 감염 우려까지 나온다.
자칫 코로나19에 감염이라도 되면 고령의 할머니에겐 치명적일 수 있고, 나머지 가족들도 출근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여년만에 내린 기록적 폭우는 서울 등 수도권을 집어삼켰다. 시내 주요 도로와 하천 곳곳이 침수되고, 뒤엉킨 침수차량이 도로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등 말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지난 8일 물폭탄이 서울을 덮친 지 일주일이 지난 16일 파이낸셜뉴스가 침수 피해 현장인 서울 동작구를 찾았다.
사당종합체육관 대피소에서 만난 이재민들의 마음에는 수마(水魔)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재민들은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안타깝고 불안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피해 복구와 이재민 구호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돌아갈 곳 잃은 이재민들..코로나19까지 이중고
대피소 생활중인 주민들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 모르는 막막한 심정에 연신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식사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하는 도시락과 주민센터에서 제공하는 김밥 등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있다.
대피소에서 만난 A씨(63·남)는 "멘붕이죠, 정신이 없고, 언제 집에 돌아갈지도 모르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살고 있던 빌라가 침수돼 대피소에 몸을 맡겼다. 원래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대피소 생활을 어머니가 불편해하자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고 한다. A씨는 코로나19 재유행 조짐을 우려했다.
그는 "매일 (자가진단 키트)검사하고 있는데, 어쩌겠어요, 방법이 없네요."라고 했다.
오물에 피부염, 악취까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집
나흘 내내 집안의 오염된 물을 퍼날랐다는 양모(45·남)씨는 피부 발진으로 고생중이다. 파견나온 보건소 관계자에게 피부염 약을 처방받은 그는 "똥물에 나흘간 들어가서 물을 펐더니 어제부터 피부에 뭐가 스멀스멀 올라오네요"라고 했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인 양씨 종아리와 팔에는 온통 두드러기 투성이였다.
살고 있던 반지하 주택이 침수된 양 씨는 폭우가 쏟아진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당시 양 씨는 집 근처에 있었는데, 집에 계신 아버지가 걱정돼 몇번이고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달음에 집으로 갔는데 유리창은 깨져있었고 물은 이미 무릎높이까지 차 있었다. 양씨는 안방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를 깨워 겨우 탈출했다. 비가 그친 뒤 집으로 돌아가 홀로 복구작업에 나선 양 씨는 연신 바가지로 물을 퍼냈지만 역부족이었다. 폭우로 정화조까지 역류돼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겨우 물을 퍼냈지만 각종 오물과 흙투성이인 집안은 더이상 사람 살 곳이 못됐다. 양 씨는 "삶의 터전을 잃은 기분이죠, 동작구 토박이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혹시 코로나19에 감염될까봐 잘 때도 아예 마스크를 쓰고 잔다.
동작구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현재 관내 18개 대피소에 약 200명의 이재민이 대피중이다.
이날까지 총 3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고, 기자가 찾은 사당종합체육관에서도 1명의 확진자가 나와 비상이 걸렸다. 동작구는 하루 2번 소독과 방역을 시행하고 있고, 자가진단키트로 이재민들이 하루 한번씩 검사하고 있다.
체육관 1층에는 적십자사의 재난 심리회복 상담소가 12일부터 운영중이다.
김귀래 대한적십자사 재난심리활동가는 "이재민 분들 마음에 여유가 없으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에 놓인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이어 "극동아파트 옹벽이 무너지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어르신분들도 계신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내려놓으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전국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요"
한편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자원봉사자들은 도움의 손길을 보태러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집계에 따르면 지난 10일부터 15일까지 센터를 통해 침수 피해 복구 작업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는 총 3570명이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 관계자는 "기관이나 봉사활동 단체, 군인 봉사 등은 따로 집계하기에 실제 봉사에 참여한 인원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날 오후 1시, 서울 동작구 사당2동 주민센터에는 침수 피해 복구를 위한 자원봉사자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각자 수해 피해 현장으로 흩어져 복구에 힘썼다.
서울 연남동에 사는 김모(44·여)씨는 "봉사활동을 한 적은 없는데, 반지하에서 참변을 당하셨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뭐라도 힘을 보탤 일이 없을까 하고 신청해서 왔다"고 했다.
김 씨는 다른 자원봉사자 5명과 함께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 인근 침수된 주택 반지하 피해 복구작업에 함께했다.
이들은 경기 파주·의정부, 서울 동대문구 등 다양한 지역에서 왔고, 이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허윤호(18·남)군은 "수능이 더 다가오면 봉사할 짬이 없을 것 같아서 시간을 내서 왔다"며 "현장은 뉴스보다 더 피해가 심각했고, 이런 봉사가 정말 필요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반지하는 이미 무릎 높이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고, 물을 퍼내는 자원봉사자들의 옷은 금새 각종 오물로 뒤범벅이됐다. 양수기까지 동원해 물을 빼냈지만 수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심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자원봉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쓸만한 물건이 없나하고 각종 집기를 밖으로 빼내는 중이었다.
의정부에 거주중인 간호사 윤모(24·여)씨는 이날 아침 동작구까지 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윤씨는 "봉사활동 현장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 정말 많다고 느꼈다"고 소감을 전했다.
wongood@fnnews.com 주원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