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후광 업고 공산당 총서기 발탁... 개혁·개방으로 세계 2위 경제대국 이끌어
2022.11.30 20:58
수정 : 2022.11.30 20:58기사원문
장 전 주석은 1926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뒤 상하이교통대학교 시절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이러한 이력 덕분에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와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비서장, 전자공업부 부부장·부장 등 여러 기술연구기관을 이끌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 전 주석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서한에서 "중국의 전자공업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상하이시 시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이 시절 톈안먼 사태가 터졌고 덩샤오핑의 눈에 들면서 1989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1993년 중국 국가주석 자리에 각각 올랐다. 총서기를 맡은 때부터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내놓은 2004년 9월까지 15년 동안 최고 권력을 움켜쥔 셈이다.
그는 중국 현지 국가주석으론 최초인 1995년 11월 처음 방한했다. 또 1997년 재임 중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다. 2년 뒤인 1999년엔 마카오도 넘겨받았다.
최대 업적은 이른바 혁명 제3세대를 이끌며 중국을 '최대 개발도상국'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반면 톈안먼 사태를 수습하며 최고 권력에 오른 인사답게 종교단체인 파룬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인권을 무시했다는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 전 주석은 최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시진핑 국가주석의 등장으로 힘은 소멸되기 시작했다. 시 주석 집권 5년 만에 장쩌민 계열이자 상하이방 인사 300여명이 '반부패 칼날'에 낙마했다.
장 전 주석이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은 201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이다.
정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