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심한 복통으로 OOO을 복용했다
2023.04.01 06:00
수정 : 2023.04.01 06:00기사원문
때는 조선 임진년(1592년), 왜놈들이 남해에서 소란을 피우다 못해 육지까지 침략을 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문제는 이순신에게 고질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복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복통은 왜놈들이 쳐들어 올 당시에는 상당히 심해진 상태였다. 사실 전시에 군사들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로써 의원들도 모두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을 뿐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장에서 의원들에게 그 흔한 침치료, 뜸치료 한번 받지 못해 병을 키워갈 수밖에 없었다.
임진년 사월 어느 날, 이순신은 낮부터 불편하던 배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복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더니, 복통은 점점 심해졌고 밤새도록 신음소리를 낼 정도였다.
“장군! 무슨 일이십니까? 신음소리를 내시는 것 같은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하고 막사를 지키는 초병이 물었다.
이순신은 “별일 아니다. 내가 아프다는 말을 다른 군사들에게 말하면 안 될 것이다. 나는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안심을 시켰다.
왜구들의 소란은 그치지 않아 전쟁은 해를 넘겼다. 이듬해 어느 날도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다녀가서 마음이 흡족하였으나, 그들이 돌아간 이후 밤이 되자 몸은 다시 불편해지면서 베개를 안고 신음을 했다. 배를 만져보면 덩어리가 만져지는 듯하다가도 풀렸고, 쓰린듯하면서도 쥐어짜는 증상이 고통스러웠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 와중에 자신의 몸 일신(一身)을 걱정하고 있자니 한심스러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배가 아파서 고생을 하다가 밤이 되어도 그치질 않고, 심지어 닭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눈을 붙이지 못했고 아침이 되어서야 통증이 그치기도 했다. 몸이 불편해서 낮에 공무를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경우도 많았다. 복통은 3~4일 동안 지속된 날도 있었다. 이순신은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종일 속이 쓰리고 아파서 식사도 못한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은 속이 불편해서 구토를 하면 편해졌다. 아마도 위장기능도 약해지고 궤양 또한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위궤양은 신경을 많이 쓰면 생기기도 하는데, 간화(肝火)나 심화(心火)에 의한 분노나 근심걱정 등에 의해서 쉽게 악화된다. 속쓰림과 식욕부진, 소화불량은 늘상 동반된다.
전쟁이 시간을 끌며 길어지면서 왜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순신은 통분(痛忿)하고 통분했다. 남해의 바닷바람 또한 거세니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역시나 그럴 때면 복통은 심해졌다. 바다의 냉풍(冷風)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견뎌내야 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어 배를 만져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날도 밤새도록 신음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도 복통이 잦아들지 않자 보관해 두었던 환약을 꺼냈다. 바로 온백원(溫白元)이었다. 이 환약은 유성룡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유성룡은 온백원을 허준에게 처방받아서 전해 준 것이다.
허준은 당시 선조 임금의 어의였다. 허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선조가 피난 길에 올랐을 때도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유성룡 또한 선조의 곁을 지킨 충신이었다. 유성룡은 자신도 고뿔에 걸리면 허준에게 처방을 받고는 했다. 그는 허준에게 이순신의 병고(病告)를 말하고서는 처방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허준에게 처방을 받았다는 안도감보다는 그 환약이 온백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걱정이 더 컸다. 온백원은 일반적인 위장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소화불량이나 조잡증(嘈雜症) 같으면 평위산(平胃散)을 처방이었을 것이고, 잦은 장염이나 복통, 설사였다면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이고, 체기나 복부창만을 겸한 복통이었다면 소체환(消滯丸)을 처방했을 것인데, 온백온이라니, 이순신도 이로써 자신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서에 보면 온백원(溫白元)은 적취(積聚), 징벽(癥癖) 등 장내에 종양이 있거나 비색(痞塞), 심통(心痛) 등 기운이 막혀서 명치와 가슴에 통증이 심하고, 전광(癲狂) 사수(邪祟) 등 정신이 미칠 듯이 오락가락할 때 및 일체의 뱃속에 생긴 모든 질환을 다스리는 처방으로 나온다. 적취와 징벽은 뱃속에 생긴 모든 덩어리를 말한다. 온백원은 천초, 오수유, 건강, 천초, 파두상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약성이 매우 뜨겁고 강한 처방으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복용할 수도 없는 독한 처방이다.
이순신은 온백원 4알을 따뜻한 생강차로 삼켰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더니 복통이 좀 잦아들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통증이 나타날 때만 온백원을 복용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며칠 후면 몸의 불편함은 여전했다. 사실 남아 있는 온백원도 넉넉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밤마다 식은땀도 많이 흘렸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이며 위아래 두 겹의 모든 옷들이 흠뻑 젖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땀 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심각했다.
밤사이 식은땀은 음허증(陰虛症)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보통 밤사이에 땀이 도둑처럼 왔다가 간다고 해서 도한(盜汗)이라고 하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신경을 많이 쓰면서 혈허(血虛)에서 음허(陰虛)로 증상이 악화된 것이다. 며칠 동안 밤마다 옷이 젖을 정도의 땀을 흘린다는 것은 음양(陰陽)의 부조화와 함께 기혈(氣血)의 쇠약함이 극심했음이 분명하다. 소위 말하는 기혈과 음양을 보하는 보약이 필요했음이 분명한 증상들이다.
이순신은 게다가 우울감도 심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 배의 봉창 아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과 회포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저녁식사를 마다하고 홀로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닭이 울 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침소에 누워도 편하지 않으니 한숨이라도 눈을 붙였기에 이나마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지는 듯해서 슬픔이 밀려왔고 우울감이 떠나질 않았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시국, 이를 어찌할꼬. 이순신은 어느 한 날, 부하들과 함께 수루(戍樓)에 올라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왜놈의 정찰선이 눈에 알짱거린다. 그날따라 복통이 진정되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괴롭다. 해가 기울어 바다가 어둑해지자 모두들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배가 아파서 저녁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 먼저 내려들 가거라. 난 좀 더 있다 내려 갈테니 걱정들 말거라.”하며 일렀다.
그 날따라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이순신은 붓을 꺼내 시를 한편 적었다.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명월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편첨수)’ 내용을 직역하면 이렇다.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서서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때에 어디선가 오랑캐 왜놈의 피리소리가 들리니 근심이 더해지는구나.’라는 내용이었다. 불현듯이 배가 더 조이는 듯 아파졌다. 저 깊숙한 곳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길게도 나왔다.
왜놈들이 쳐들어온 지 벌써 5~6년이 지났지만, 이순신의 건강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밤마다 통증으로 신음하면서 옷을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렸다.
“해남에 있던 적들이 멀리 달아난 것 같습니다.”라는 전령을 받고서도 안심되기는 커녕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결국 새벽을 맞이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식은 땀으로 온 옷이 흥건했다.
벌써 전쟁은 7년째 이어졌고, 1598년 12월 16일, 겨울의 칼바람이 매섭던 그날도 이순신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주위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참가한 것이다. 바로 노량해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그 날 왜놈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제 더 이상 몸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날을 지새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왜놈들과 싸우면서 병마(病魔)와도 싸워야 했다. 온백원(溫白元)이 허준의 처방이면 뭐하랴. 그의 곁에 평범한 의원 한명 없었으니 말이다. 전장에서 밤마다 혼자서 신음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제목의 ○○○은 온백원(溫白元)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난중일기> 壬辰四月. 初二日辛卯. 晴. 食後氣甚不平.漸漸痛重. 終日達夜呻吟. / 癸巳五月. 十七日庚午. 晴. 曉大風. 중략. 賊徒四散焚掠. 痛憤痛憤. ○終日大風. 心事煩亂. / 癸巳五月. 十六日己巳. 晴. 중략. ○氣甚不平. 卧枕呻吟. 중략. 爲國多慮. 事事如是. 尤極興歎而潸淚也. / 癸巳五月. 十八日辛未. 晴. 早朝. 氣甚不平. 呑溫白元四丸. 有頃. 快注. 氣似平安. / 癸巳八月. 十三日甲午. 營來公事題送. 氣甚不平. 獨坐篷下. 懷思萬端也. / 乙未六月初五日丙午. 晴. 중략. 自午雨作. 未能射帿. 余則氣甚不平. 廢夕食. 終日苦痛. / 丙申二月三十日丁卯. 晴. 중략. ○氣甚不平. 達夜虛汗. / 丙申初二日己巳. 晴. ○氣甚不平. 不坐. / 丙申十七日甲申. ○是夜. 虛汗沾背. 兩衣盡濕. 氣不平. / 丙申二十二日己丑. 晴. ○汗出無常. (임진년 1592년 4월 초2일. 맑음.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 온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계사년 1593년 5월16일. 맑음. 중략.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중략.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동년 5월17일. 맑음.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다. 중략.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동년 5월18일. 맑음.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 4알을 먹었더니, 한식경 후에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동년 본영에서 온 공문에 결재하여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을미년 1595년 6월5일. 맑다. 오정 때부터 비가 내려서 활을 쏘지 못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식사도 먹지 않고, 종일 속이 쓰리고 앓았다. 병신년 1596년 2월30일. 맑다. 중략.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병신년 3월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동년 3월17일.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에까지 흘러 두 겹 옷이 흠뻑 다 젖었다. 몸이 불편하다. 동년 3월22일. 맑다. 중략. 땀 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閑山島歌.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서서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때에 어디선가 오랑캐 왜놈의 피리소리가 들리니 근심이 더해지는구나.)
< 유성룡 비망기입 대통력(柳成龍 備忘記入 大統曆)> 갑오년. 1594년 7월 24일. 병을 얻어 보중익기탕과 삼소음을 복용했다. 7월 28일. 인삼강활산을 복용하니 땀이 나 열이 내렸다. 경자년 1600년 6월 7일. 許浚介藥品唐扇. (허준이 약품과 당나라 부채를 전해주었다.)
< 동의보감> 溫白元. 治積聚癥癖, 黃疸, 鼓脹, 十種水氣, 八種痞塞, 五種淋疾, 九種心痛, 遠年瘧疾, 及療七十二種風, 三十六種尸疰, 癲狂, 邪祟, 一切腹中諸疾. 川烏(炮) 二兩半, 吳茱萸ㆍ桔梗, 柴胡, 菖蒲, 紫菀, 黃連, 乾薑(炮), 肉桂, 川椒(炒), 巴豆霜, 赤茯苓, 皂莢(灸), 厚朴, 人參 各五錢. 右爲末, 煉蜜和丸梧子大. 薑湯下三丸, 或五丸至七丸. (온백원. 적취, 징가, 현벽, 황달, 고창, 10종의 수기, 8종의 비색, 5종의 임질, 9종의 심통, 오래된 학질과 72종의 풍증, 36종의 시주, 전광, 사수, 뱃속의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한다. 천오. 습지에 싸서 굽는다. 2.5냥, 오수유, 길경, 시호, 창포, 자완, 황련, 건강. 습지에 싸서 굽는다. 육계, 천초. 볶는다. 파두상, 적복령, 조협. 굽는다. 후박, 인삼 각 5돈. 이 약들을 가루내고, 졸인 꿀로 반죽하여 오자대로 환을 만든다. 생강 달인 물로 3알 또는 5알 또는 7알까지 먹는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