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변하는 천가지 표정의 그릴로 와인..시칠리아의 숨겨진 보물을 봤다
2023.06.08 17:32
수정 : 2023.06.08 17:42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끊어질듯 이어지다 숨가쁘게 치솟고(Allegro non molto), 나뭇잎을 때리는 소낙비처럼 와라락 쏟아내기도 하고(Presto)…."
얼마 전 비발디 '사계-여름'의 현란한 바이올린 선율이 휙 스쳐가는 화이트 와인을 만났습니다.
현이 끊어질듯 끈적이는 강렬한 선율로 관객을 녹진하게 몰아부치는 이무지치가 아닌, 협주자의 현을 타고 넘나들며 너무도 감성적인 선율을 만들어내는 클라라 주미 강을 닮은 그런 와인 말입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토착품종 그릴로(Grillo)는 웬만한 와인쟁이에게도 낮선 품종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거나 온도가 달라지면 갑자기 샤르도네처럼 무끈하게 내려앉기도 합니다. 떼루아에 따라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나오고, 서빙 온도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말 수시로 변합니다. 샤르도네(Chardonnay)의 이탈리아 버전이랄까요. 마치 시칠리아 섬에 뜬 무지개같은 와인입니다.
와인21이 지난 5월31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파인다이닝 '주은'에서 이탈리아 시칠리아 와인을 선보이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풍요'와 '융화'로 상징되는 시칠리아는 아름다운 지중해 바다와 온화한 기후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잘 자라는 곳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리스, 로마, 반달, 고트, 이슬람, 노르만까지 유럽을 휩쓸던 세력들은 늘 힘이 자라면 가장 먼저 이 천국같은 섬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섬을 정복하기보다는 한결같이 이 매력적인 섬에 녹아들었습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톨릭과 이슬람이 차례로 들어왔지만 서로를 파괴하기보다는 존중하고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지만 절대로 떼루아를 넘어서거나 넘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와인21이 선보인 시칠리아 와인은 총 6가지로 이 중 4가지가 그릴로 품종의 와인입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프라빠토, 네로 다볼라 품종의 레드 와인입니다.
■까사 비니콜라 파지오 그릴로 브뤼 NV(Casa Vinicola Fazio Grillo Brut NV)
그릴로로 만든 스파클링으로 굉장히 향긋한 와인입니다. 옅은 볏집색을 띠며 잔에서는 잔잔한 기포가 계속 올라옵니다. 잔에서 느껴지는 주된 향은 열대 과실향입니다. 모스카토 와인 향을 닮았지만 달치근하지 않은 게 조금 다릅니다.
입에 넣어보면 짭쪼름한 미네랄리티가 먼저 다가오며 잔에서 올라오던 열대과일, 핵과류는 물론 청사과 맛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탱크 발효 후 3개월 동안 쉬르리(Surlie) 과정을 거쳤지만 이스트 느낌은 거의 없습니다. 질감은 라이트 혹은 미디엄 정도로 무겁지 않으며 절대 달지 않습니다. 오히려 와인이 사라지는 순간 잔향에서 프로세코(Prosecco)의 쌉싸레한 글레라 느낌이 살짝 있습니다. 식전주로도 좋지만 음식없이 그냥 먹어도 굉장히 상큼한 와인입니다.
■에르메스 벤토 디 마레 그릴로 2021(Ermes Vento di Mare Grillo 2021)
진한 금색 빛 와인으로 잔에서는 풀잎, 붉은 꽃, 청사과 등 서늘한 향과 짠 내음이 물씬 풍기는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시칠리아의 나른한 바닷바람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잔을 기울이면 역시 짠 맛의 미네랄리티와 아주 높은 산도가 끝내줍니다. 산도가 굉장히 높은데 이게 독특하게도 끝이 둥글려진 자극적이지만 우아한 신맛입니다. 쉬르리 과정을 거치면서 산도가 둥글려졌습니다. 그런데 와인은 무겁지 않습니다. 질감도 라이트 혹은 미디엄라이트로 굉장히 발랄합니다. 더없이 쾌활하지만 우아함을 내려놓지 않는 그 경계가 참으로 묘합니다.
■타스카 달마리타 모찌아 그릴로 2022(Tasca d'Almerita Mozia Grillo 2022)
이 와인도 그릴로 품종의 와인입니다. 옅은 지푸라기 색으로 이전 와인들과는 색부터 다릅니다. 약간 오렌지 속껍질 색도 보입니다. 쉬르리 컨택을 오래 거친 와인으로 잔에서는 전체적으로 붉은 색 꽃 향과 청사과 등 차가운 과실향이 살짝 살짝 올라오는 정도로 굉장히 절제된 모습을 보입니다. 입에 넣어봐도 잔에서 느낀 그대로입니다. 가벼운 질감에 아주 좋은 산도와 차가운 느낌만 들어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잔의 온도가 올라가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잔을 가까이 하기도 전에 잘 익은 배 향이 훅 들어옵니다. 게다가 또스티한 풍미까지..완전히 다른 와인으로 변했습니다. 와인이 온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 와인 변화무쌍합니다. 이 와인은 잔을 좀 많이 채워서 차가운 온도부터 상온까지 변하는 느낌을 즐겨보세요.
■비냐 디 페티네오 프라파토 2021(Vigna di Pettineo Frappato 2021), CVA 카니카티 아퀼래 네로 다볼라 2020(CVA Canicatti Aquilae Nero d'Avola 2020)
프라파토나 네로 다볼라는 둘 다 레드 와인을 만드는 시칠리아 토착 품종입니다. 프라파토는 피노 누아(Pinot Noir) 혹은 가메이(Gamay) 색깔처럼 아주 연하고 아름답습니다. 잔에서나 입에서나 느껴지는 주된 아로마는 딸기맛 캔디향과 약간의 훈연 느낌입니다. 산도도 아주 좋고 타닌이 아주 약하게 묻어있어 북쪽의 바르베라(Barbera)를 더 닮아 있습니다. 가볍게 마시는 와인입니다.
그러나 네로 다볼라 와인은 떼루아나 와이너리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입니다. 오크 터치를 전혀 하지 않은 와인입니다. 잔에서는 트러플 향을 비롯한 감칠맛 향이 제일 먼저 올라오고 초콜릿 향과 훈연향도 있습니다. 입에 넣어보면 피노 누아처럼 질감이 의외로 가볍고 산도는 꽤 높습니다. 타닌은 아주 잘게 쪼개져 들어와 입속을 얇게 발라버립니다. 매력적입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