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엔저 특수에 ‘최대 수출실적’… 30년 경기침체 벗어났다

      2024.01.01 18:47   수정 : 2024.01.01 18:47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도쿄=김경민 특파원】 일본 경제가 마침내 '잃어버린 30년'의 끝을 넘어 새로운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오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끊고, 실물경제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각종 경제지표들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내놓은 17조엔(약 160조원) 규모의 경제대책은 이러한 변화를 채찍질하는 마중물이 될 전망이다.

'슈퍼 엔저'(엔화가치 하락)의 부작용과 같은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일본 경제는 장기정체에서 벗어나 활력을 되찾아가는 모습이다.

■초엔저 엔진, 韓성장률도 추월

1일 재무성에 따르면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2023년 일본 경제성장률(GDP)을 직전 7월 전망 대비 0.6%p 오른 2.0%로 수정 제시했다.
1.4%로 전망된 한국보다 0.6% 높은 수준으로, 한일 성장률 역전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일본은 33년 만에 엔화 가치가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수출실적은 사상 최대를 기록 중이다. 지난해 상반기(4~9월)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는 전년동기 대비 3배 급증한 12조7064억엔(약 110조원)을 기록했다. 이는 반기 기준 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원유 가격 급등이 일단락하면서 수입액은 51조엔이나 줄어든 반면 엔저효과를 본 수출액이 50조엔이나 늘어난 덕분이다.

일본 수출기업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슈퍼 엔저 특수를 누린 일본 주요 대기업은 연간 2조엔(약 18조원)가량 이익 증가효과를 볼 것으로 분석됐다.

대표적으로 업계 1위 도요타자동차는 연간 순이익 전년보다 60% 이상 많은 약 4조엔을 벌어들일 것으로 전망됐다. 역대 최대였던 2022년(2조8501억엔)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다.

주식시장도 훈풍이었다. 닛케이지수는 지난해 11월 한때 3만3853까지 치솟아 52주 신고가를 경신했다. 절반 이상의 상장사들이 연중 최고가를 연달아 갈아치웠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도쿄 도심 6개구의 아파트 평균 희망매도가는 70㎡당 1억791만엔으로 2002년 집계 이후 9개월 연속 신고가를 썼다.

'값싼 일본'에는 외국인 관광객도 물밀듯이 들어왔다. 10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251만6500명으로, 코로나19 확대 이전인 2019년 같은 달보다 0.8% 많았다. 전년동기 대비로는 5배나 상회하는 수치로 월별 방일객 수가 처음 코로나19 이전을 넘어섰다. 7~9월 관광 관련 소비총액은 1조3904억엔(약 12조원)으로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다를 올렸다.

일본 당정은 임금인상과 투자촉진을 골자로 한 종합경제대책의 예산 규모를 17조엔(약 152조원)대 초반으로 확정했다. 중앙정부, 지자체, 민간투자를 모두 포함한 사업 규모는 37조4000억엔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모처럼 찾아온 경제성장 국면을 실기하지 않고 마중물을 부어 극대화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서 조류가 바뀌어 30년 만에 새로운 경제무대로 이행할 수 있는 큰 기회를 맞이하는 가운데 공급력 강화를 경제대책의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임금상승이 고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인 조치로 국민의 가처분소득을 뒷받침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시책을 마련했다. 시책을 한시라도 빨리 국민에게 전달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는 또 "원가절감형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기 위해 3년 정도의 전환기간을 두고 공급능력을 대폭 강화하는 집중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잘 먹고 갑니다~" 상반기 정책 바꿀 듯

다만 엔저가 장기화하면서 부작용의 그림자도 커지고 있다. 약한 엔화는 수출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지만, 수입가격을 상승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엔저는 수입기업 입장에선 조달비용 증가이며 이는 곧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진다.

엔저는 일본의 경제 규모도 축소시켰다. 교도통신은 "2023년 일본의 명목 GDP는 지난해보다 0.2% 감소한 4조2308억달러(약 5726조원)로 예상된다"며 "일본은 독일에 역전돼 세계 4위로 한 계단 내려갈 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이어 "일본은 인구가 3분의 2인 독일보다 GDP가 작아지는 등 1인당 노동생산성 저하가 과제가 됐다"며 "국제통화기금(IMF) 예측에 따르면 2026년에는 세계 1위 인구대국이 된 인도가 경제 규모 4위 국가로 올라서고, 일본은 5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엔저 출구전략을 고민 중이다. 일본은행(BOJ)이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접고 금리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리인상 시기의 전제였던 물가·임금 인상 동향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BOJ 내부에서도 대규모 금융완화 중단을 마무리할 시점이 도래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BOJ는 현재 10년에 걸친 대규모 돈풀기 정책에 대해 검토를 진행 중이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지난해 11월 나고야 간담회에서 물가 목표에 대한 달성 가능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 시장은 정책전환을 위한 BOJ의 정지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업계에선 BOJ의 금리인상 시기는 내년 상반기가 될 것이란 구체적 전망도 나온다.

■국민들은 "나쁜 엔저" 기시다 교체설 대두

이처럼 일본 경제는 회복하고 있지만, 이를 주도한 기시다 내각의 인기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이 실시한 지난해 12월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16%로, 전달 조사보다 5%p 하락했다. 2021년 10월 정권 출범 이래 최저이며 자민당 정권에서 내각 지지율 20% 미만은 2009년 7월 아소 다로 내각 이후 처음이다. 기시다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비율은 전달보다 5%p 상승한 79%로 이 신문이 내각 지지율 조사를 시작한 1947년 7월 이후 가장 높았다.

기시다 내각의 처참한 인기는 민생 부담이 커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장기침체가 계속된 지난 30년간 일본인들은 임금도 물가도 변동이 없는 '제로(0)'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원자잿값 상승과 엔저로 일본도 물가가 3~4% 뛰기 시작했다. 이를 임금이 올라 받쳐줘야 하지만 더딘 인상폭으로 실질임금은 17개월 연속 마이너스였다.

엔저로 물가가 오르면서 지난해 1~8월 일본 엥겔지수(가계 소비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는 평균 27.3%까지 뛰었다. 코로나19 여파가 있었던 2020년을 제외하면 1980년대 초반과 비슷하다.

'엔저는 좋고, 엔고는 나쁘다'는 게 상식이었으나 막상 마주한 슈퍼 엔저의 현실에선 기업들의 살만 찌우고, 정작 서민은 더욱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나쁜 엔저' '슬픈 엔저'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설상가상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세이와정책연구회)의 정치 비자금 사태도 추락하는 지지율에 기름을 부었다.
기시다 총리는 비자금 혐의를 받고 있는 각료 4명을 포함, 총 10명의 아베파를 경질했다. 전체 19명의 각료 중 자민당 소속으로는 아소파가 5명으로 가장 많아졌다.


마이니치는 "향후 정권 운영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년 1월 후반 소집될 것으로 보이는 정기국회를 위해 기시다 총리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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