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가 아닌 글로벌 사우스가 온다
2024.02.14 18:28
수정 : 2024.02.14 18:28기사원문
단어 나열만 놓고 보면 오락가락하는 듯하지만 그 나름대로 변화의 패턴이 엿보인다. 일단 중국이 쏙 빠졌다는 점이다. 미중 패권구도에서 균형을 잡던 공식이 깨졌다.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안보=미국'은 고정 상수가 됐지만 경제는 미국의 자리에 글로벌이 들어섰다. 종합해 보면 최근 몇 년 사이 큰 변화는 경제의 세계화가 최대 화두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화,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개념과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면 세계화만큼 허무한 용어도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표방한 '세계화'가 경제확장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세계화는 국제환경에 맞게 국내의 인식과 인프라를 개혁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역대 정권들도 글로벌 확장정책을 내걸었는데, 이전 정권에서 내세운 모토는 신북방·신남방 전략이다.
요즘 유행어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다. 글로벌 사우스는 '개발도상국' 혹은 '저개발국' 등으로 불리는 국가들을 가리킨다. '사우스'라는 말이 붙은 건 이들 국가 대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남반구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용어 같지만 수십 년 전부터 익숙했던 단어가 소환된다. 제3세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열강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3대륙의 신생국 그룹을 제3세계라고 불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선진국을 제1세계,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공산권을 제2세계로 칭하면서 민족주의와 비동맹중립주의를 표방한 그룹을 제3세계라고 불렀다. 외교력도 경제력도 별 볼 일 없는 그룹으로 간주됐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힘없던 제3세계가 강력한 글로벌 사우스로 환골탈태하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예측한 2075년 세계 경제순위 10위권에 인도(2위), 인도네시아(4위), 나이지리아(5위), 파키스탄(6위), 이집트(7위), 브라질(8위)이 들어간다. 글로벌 사우스가 절반을 넘는다. 멕시코(11위), 필리핀(14위) 등 상위권에 글로벌 사우스가 대세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의 저력도 여전하다. 확실한 건 글로벌 사우스는 1세계와 2세계로 양분한 '나머지'가 아니라 당당한 세계의 주요 축이 된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저력은 이미 피부에 와닿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수출 다변화를 하려면 글로벌 사우스의 생산력과 소비력을 간과할 수 없다. 좁은 내수시장을 탈피하려는 국가나 기업들이 글로벌 사우스 시장을 빼고 해외 전략을 짤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경제 영역만 한정된 게 아니다. 군사·외교 면에서도 글로벌 사우스의 입김이 갈수록 거세진다. 가깝게는 우리나라가 참패한 부산 엑스포 유치사례도 같은 이치다.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양자 대결에서 성패의 키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표심이었다.
중국과 미국의 양대 축을 기준으로 경제와 안보의 선택지를 만드는 건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은 경제와 외교 관계에 다극화 시대가 열렸다는 점을 시사한다. 개방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으로선 오히려 선택지가 넓어지기 때문에 위기보다 기회로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약진으로 요동치는 미국 대선 풍향계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주요 2개국(G2)을 놓고 저울질하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극화를 중심으로 선택지를 넓히는 '전략적 지향성(Strategic orientation)'으로 피버팅할 때다.
jjack3@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