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요자 보호’ 강조한 당국, 구제 대상은 은행 자율에?

      2024.09.08 18:13   수정 : 2024.09.08 18:13기사원문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가계대출을 관리하는 동시에 실수요자는 보호하라'는 과제를 내주면서 실수요자 범위를 두고 현장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은행은 다주택자들의 주택담보대출 제한을, 어떤 은행은 1주택자의 전세대출도 중단하는 등 실수요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의 엇갈린 발언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가계부채 관리 속도가 늦어지더라도 실수요자들에게 부담을 줘선 안 된다"며 보완 대책을 시사한 반면,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당국이 실수요가 어디까지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은행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은행권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대출정책을 세우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면서 당분간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한다.


■금융당국도 실수요자 범위 '혼란'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 주문에 최근 은행들은 앞다퉈 1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중단, 조건부 전세자금 대출 제한, 거치 기간 폐지 등을 쏟아냈고, 애꿎은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는 비판이 커졌다.

이에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4일 "가계부채 관리 속도가 늦어지더라도 (실수요자들에게) 부담을 줘선 안 될 것"이라며 은행권에 실수요자 보호를 위한 대책을 주문했다.

이 원장은 "은행권 관리 강화 조치 전 대출 상담 및 신청이 있었거나 주택 거래가 확인된 차주에 대한 보호 등 이미 부동산 계약을 맺었거나 이사를 계획하면서 자금조달을 알아보던 이들"을 언급했다. 사실상 '실수요자'로 해석될 예외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셈이다.

하지만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6일 "어느 부분이 실수요자가 아니냐고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발언하자 실수요자 범위를 둘러싼 모호함이 가중됐다. 김 위원장은 "여러 채 가진 사람이 집을 사는 건 후순위" "살 집이 아닌데 전세를 끼고 사는 것도 꼭 지금이냐" "유주택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실수요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은행에 넘겼다. 고객을 잘 아는 은행이 판단하고 관리하는 게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은행들이 '난제'를 떠안게 됐다. 앞서 1주택자·다주택자를 겨냥해 △주담대 최장 만기 30년으로 축소 △주담대 보증상품 신규 가입 중단 △생활안정자금 한도 1억원으로 제한 △조건부 전세대출 중단 △유주택자 전세대출 중단 등을 발표한 은행들은 서둘러 실수요자를 위한 예외 조항을 내놓고 있다.

우리은행은 이날 가계대출 취급제한 예외요건 9가지를 언급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다양한 실수요자 사례에 대해서는 실수요자 전담팀이 세심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예외요건에는 결혼을 앞두고 수도권에서 주택을 구입하거나 임차하는 경우, 수도권 지역으로 직장이 변경된 경우, 자녀가 수도권 지역으로 진학하거나 전학한 경우 등이 포함됐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 자율에 맡겼음에도 예측을 하고 정책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며 "영업점에서 대출 고객을 상담하다가 애매하면 소관 부서에서 판단을 해줘야 하는데 기준이 애매해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토로했다.

■실수요자 피해 반복, "은행·당국 합의 필요"

과거 부동산 가격 급등 시기에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발표 이후 실수요자들의 아우성에 정부가 서둘러 추가 대책이 나온 사례가 있다.

지난 2017년 8·2대책 당시 정부는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의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예외 없이 40%로 낮추고, 다주택자의 LTV·DTI 한도를 30%까지 강화했다. 이후 실수요자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정부는 서둘러 보완책을 내놨다. 대책 발표 전날까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거나 중도금대출을 받은 무주택자, 일정 기간 안에 기존 주택을 처분하기로 한 1주택자(일반대출의 경우 신규대출 취급 후 2년 이내, 집단대출은 신규주택 소유권 등기 후 2년 이내) 등을 예외로 인정했다.

2022년 1월에도 금융위는 고액신용대출을 받은 고소득 차주에 대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하는 '가계대출에 관한 리스크 관리기준'을 발표하면서 실수요자에 대한 예외를 인정했다. 예외 대상은 △분양주택에 대한 중도금대출 △재건축·재개발 주택에 대한 이주비대출·추가분담금에 대한 중도금대출 △서민금융상품 △대출금액 300만원 이하 △전세자금대출 △보험계약대출 △할부·리스·현금서비스 카드론 등이다.

이들 사례는 무주택자와 일시적 1주택자를 중심으로 대책 발표 이전에 진행된 중도금·집단대출이나 전세자금대출, 서민상품 등에 대한 예외를 인정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실수요자들의 장인 만큼 실거주 목적인지,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대책을 마련해 실수요자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지해 부동산114 연구원은 "문재인정부 당시에는 가수요가 많았지만 지금은 취득세 중과로 인해 3주택 이상이 주택 매수시 리스크가 너무 커진다"며 "무주택자와 1주택자, 2주택자 사이에서 움직이는 시장이기 때문에 명확한 2주택자를 걸러내고, 명백한 실수요자를 우대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건부 전세자금대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1주택자이면서 전세를 놓는 경우"라며 "올해 11월 입주를 앞둔 서울 둔촌동 올림픽파크포레온의 경우에도 은행과 당국이 합의해 어떻게 기준을 정하느냐에 따라 선의의 피해자가 얼마나 생길지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이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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