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한국 감자의 역사
2024.10.28 09:46
수정 : 2024.10.28 09:54기사원문
한국 감자의 원조는 당연히 강원도다. 감자를 한자말로 북저(北藷), 토감저(土甘藷), 양저(洋藷), 지저(地藷)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쪽에서 왔다. 남미 안데스 산록이 원산지인데, 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식민 지배를 하던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 근대사에서 아일랜드 기근을 막는데 기여하고, 독일의 식량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1824년에 관북으로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한국인들은 흉년에 감자로 자주 기근을 넘겼다. 감자는 산지 지형과 기후의 특성을 가진 강원도의 많은 지역들에서 주식이었고, 남쪽 경상도에서도 가뭄에 구황 작물 역할을 했다. 필자가 어릴 때 살던 경남 함안에서도 쌀농사가 시원치 않았을 때, 감자 수확철에 밥에 감자를 섞어 넣어 쌀을 절약했다. 쌀과 보리 외에 끼니를 이어준 것이 고구마, 옥수수와 함께 감자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감자를 주로 심는 강원도 산간 농민들을 ‘감자 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박하고 부지런하다는 느낌과 함께 힘들게 농사짓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1960년대 화전민들의 대표 작물과 식량도 옥수수와 함께 감자였다. 감자는 농사짓기에 손이 덜 가는 것으로 소중했다.
조선농회보(朝鮮農會報) 1912년 7월호에 의하면, 1879년 선교사가 감자를 들여왔고 1883년에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1920년경에는 강원도 난곡농장(蘭谷農場)에서 독일산 신품종 감자를 도입해 난곡1·2·3호라는 신품종을 한국에서 개발했다. 강원도 난곡농장’은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에 있었던 일본인 농장이었다. 정확하게는 1920년 설립된 ‘난곡기계농장’이다. 이 농장에서 독일 품종의 감자와 독일산 기계를 들여와 해발 650m의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기계농에 의해 감자를 재배했다.
조선시대 강원도 북부 회양은 한양에서 출발해 철원, 평강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였다. 회양에서 북쪽으로 그 유명한 고개인 철령을 넘으면 안변과 원산을 거쳐서 함흥으로 그리고 백두산에 이른다. 또 동남쪽으로 가면 금강산에 이른다. 당시 철령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철원에서 원산으로 직선으로 연결되는 추가령을 통해 지름길 도로와 철도가 놓이면서 더 이상 철령이 이용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으로는 여전했다.
난곡농장은 회양군 난곡면 산지 고원에 2만 정보의 방대한 면적에 자리 잡았다. 주체는 일본 아이치산업주식회사이고 독일인 5명도 참가했다. 이들이 참가하게 된 역사적 경위가 매우 이색적이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를 하면서, 중국의 독일 조차지였던 청도(靑島)에 있던 독일인 5000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이때 뒤늦게 잠시 연합군에 참전했다고 한다. 청도는 지금까지도 청도맥주로 유명하듯이 일찍이 독일의 맥주 제조와 기계 공업이 들어왔다. 이들 중 나고야 수용소에 있던 일부 독일인들이 한국의 회양군 난곡면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포로이지만 독일인답게 기계에 능숙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강한 체력으로 가졌다고 한다.
‘난곡기계농장’의 특징은 대규모이고, 기계농업이고, 유축밭 농업(有蓄田作)이었다. 즉 곡물과 축산을 연계해 생산, 가공, 판매까지 일관된 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물론 토지개량, 품종개량 등 연구에도 투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영이 여의치 않아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오랜 화전농으로 지력이 쇠하였고, 기계농이라 하지만 자갈이 워낙 많아 돌을 골라내는 작업에서 애를 먹었다. 그러나 결국 난곡 1·2·3호라는 감자 품종이 개발되면서 당시 금강산과 농장 인근에 있던 이왕조목마장, 난곡농장이 3대 명승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는 일본인 학자가 당시 기록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들이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성과 등에 대해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취락’, '조선의 임수' 등 자연환경과 함께 산업개발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소위 한반도 수탈 정책은 ‘미곡증산(米穀增産)’, ‘남면북양(南綿北羊)’,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 등의 명칭을 남긴다. 이를 위해 신작로, 철도, 저수지, 광산 등이 대규모로 건설되고 개간된다. 흥남비료, 무산철광 등이 대표적이다. 농업개간에는 동양척식이 대표적인 회사였다. 회양에는 감자 재배와 축산업이 성행했고, 낙농업과 식품공업까지 진출했다. 인근의 북쪽 안변에는 양을 키우는 목양장인 세포목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도 설립됐다. 안변은 원산에도 가깝지만, 서울까지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경원선이 거의 직선으로 나있었다. 현재 강원도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 감자 품종은 1930년대 일본 북해도에서 전래된 남작(男爵)을 비롯해 돼지감자, 수미감자, 도원감자, 러셋 감자 등이다. 러셋 감자는 현재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재배하는 품종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1980년대 강원도 농가의 소득 증강에 기여한 것은 씨감자 덕분이라 한다. 감자씨를 심어 최종 감자 수확까지는 5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씨감자는 1년이라는 빠른 생산과 높은 생산성과 함께 병충에도 강하다. 당시 씨감자는 원예조합이 사들여 전국의 감자 재배 농가에 공급했다.
1994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세워진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시험장은 2004년 고령지농업연구소로 개편되었고, 2008년 고령지농업연구센터, 2015년 다시 고령지농업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연구소에서는 개발 육종 감자와 유망품종을 선발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시험재배한 뒤 우수 품종을 전국에 보급하는 업무를 한다. 감자 외에도 고랭지에서 요구되는 배추, 무, 채소 등 작물들도 연구한다.
1824년에 시도된 한반도 감자 재배의 역사는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다. 강원도 씨감자는 K감자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감자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면서 다양한 맛과 식품으로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