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싸움에 놓인 한국 기업

      2024.12.08 18:45   수정 : 2024.12.08 18:45기사원문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어느 한쪽이 'KO' 되어서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가혹한 룰이 있다. 바로 라스트 맨 스탠딩. 미국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쌍권총을 든 살인 청부업자로 등장하는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산업계에선 치킨게임으로 많이 불리는데, 지난 2010년대 삼성전자가 값싸게 대량으로 D램을 생산하며 일본의 D램 산업을 몰락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이 현재 국내에서 재현되고 있다. 중국의 공급과잉(오버캐파), 즉 물량공세를 통한 '라스트 맨 스탠딩' 전략에 국내 제조업체들이 무너지고 있다.
중국이 내수판매가 줄어들자 저가 중국산 제품을 해외로 밀어내 국내 철강, 화학, LCD 업계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실제 최근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의 중국 공장 5곳이 매각됐거나 매각을 추진 중이며, 국내 공장 5곳은 이미 문을 닫았다.

특히 철강업계에서는 올 들어 3곳의 국내 공장이 폐쇄됐다. 포스코는 포항 1제강공장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1선재공장도 문을 닫았다. 현대제철도 포항 2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포스코는 중국 장쑤성의 제철소 매각도 추진 중이며, 현대제철은 베이징법인과 충칭법인을 팔았다.

석유화학 업계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LG화학은 스티렌모노머(SM) 생산을 멈췄고, 에틸렌옥시드(EO)와 에틸렌글리콜(EG) 생산공장도 가동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을 청산하고, 미국과 인도네시아 생산법인 지분 매각도 완료했다. 최근에는 롯데케미칼이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1∼3공장 중 2공장 가동중단 절차에 진입했다. 2공장에서 근무하던 70여명은 다른 부서로 전환배치되기로 했으며, 이로 인해 재가동은 불투명해 보인다. 글로벌 LCD 시장은 이미 중국 기업의 독주체제로 평가받고 있으며, 한때 시장을 주도하던 한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저가 공세에 밀려났다. LG디스플레이는 한국 기업의 마지막 TV용 LCD 패널 제조공장을 매각했다.

문제는 내년 초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 중국 이외 주요 국가들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보조금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글로벌 공급과잉 리스크가 높아지고, 이는 결국 죽음의 치킨게임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점에 8년 만에 대통령 탄핵정국이 재현되면서 '리더십의 실종'과 '정부 공백 사태'라는 위기가 닥쳤다. 삼성,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의 대외신인도에 적지 않은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트럼프 2기 체제 대응도 사실상 올스톱 상태다. 주요국 정부와 기업이 '원팀'을 이뤄 첨단산업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으나, 한국 기업들만 '나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원자재 수입업체들은 연일 급등하는 원·달러 환율에 사실상 환율전쟁을 벌이고 있다. 철강과 항공 분야 상황은 더 어렵다. 철강은 철광석을 수입해 제품화해야 하는 만큼 환율 영향에 직격탄을 맞는 산업군이다. 항공사들은 달러로 결제하는 항공기 리스료와 연료비 비중이 크다. 수출 '맏형'인 반도체와 자동차 업계는 단기적으로 고환율로 수익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경쟁력에 타격을 입게 될 수 있다. 일련의 정치불안이 무역으로 먹고사는 국내 산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으로 혼란에 빠진 국민과 기업을 다독여야 할 정치권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어느 한쪽이 죽어야 한다며 라스트 맨 스탠딩을 진행하고 있다. 기업들은 실적 악화, 트럼프 2기 출범, 탄핵정국 등 3중고에 직면하면서 플랜B 수립을 모색 중이다.
국내 제조업의 생사가 걸린 이 순간, 정치권도 최대한 빨리 플랜B를 제시해 국민과 기업의 걱정을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courag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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