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이 꼭 그렇다. '성장'을 추구하는 정부의 경기 부양 노력이 '엔화 약세와 달러 강세'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금리인상을 앞둔 미국의 달러 강세는 금융시장에 유동성 위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또 엔 약세가 지속되면서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수출 확대가 내수 활성화와 국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에 악영향이 우려되고 있다.
한국 경제가 고질병인 '환율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빠져들 조짐이다. 달러화가 구조적으로 강세를 띠는 '슈퍼 달러' 국면에서 엔·유로가 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종가보다 9.4원 오른 달러당 1053.8원을 기록했다. 달러 강세의 영향이다.
강한 달러의 서막이 시작됐다는 평가다. 국제금융센터 이상원 연구원은 "미 달러화는 대내외 장기금리차(7년래 최대) 등으로 볼 때 강세기조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미 출구전략을 둘러싼 불확실성, 엔저 리스크, 내수 부진 및 추가 금리인하 기대, 외국인 자금유입 약화 등으로 환율 상승압력은 이어질 전망"이라고 전망했다.
원화가치의 하락(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수출기업에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기대감은 예전만 못하다. 대기업의 경우 생산기지 다변화와 비용 개선으로 환율 변동에 따른 효과가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말 기준 미국과 중국, 유럽 등 해외에서 생산하는 비중이 61.7%에 달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김영준 연구위원은 "최근 수출 증가율이 세계교역 증가율을 하회하는 등 수출의 회복세가 예전만 못하다"면서 "수출확대가 내수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출기업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준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실제 현대경제연구원은 원.달러 균형환율 추정치를 1122~1134원으로 추정한 바 있다. 한국경제연구원도 2010년부터 올해 1·4분기까지 원.달러 환율의 평균적 중기 균형치를 1124원으로 추정했다.
오히려 미국의 금리인상 전망에 기반한 달러 강세가 한국 금융시장에 급격한 변동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환율상승으로 수입물가가 오르면 서민들의 실질 구매력은 감소한다. 경기부양에 나서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적잖은 부담이다.
더 큰 걱정거리는 가팔라진 원·엔 환율 하락과 유로화 약세다. 특히 원·엔 약세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2007년 대비 한.일 간 수출 경쟁이 치열해진 품목은 작년 기준 자동차부품, 반도체, 통신기기 등이며 전체 산업의 경합 또한 높아졌다.
하나대투증권 소재용 연구원은 '환율전쟁 2라운드'라고 얘기한다. 그는 "2010년 1라운드는 달러 약세가 용인돼 미국이 승리를 거뒀다면, 2라운드에선 유로화와 엔화가 약세를 이어가며 우세승을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등 신흥국들이 반발은 하겠지만 유로존과 일본을 상대하기는 벅차다는 분석이다.시장에서는 현재 950원대인 환율이 내년에는 100엔당 800원대까지 하락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시장에서는 한국이 통화전쟁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현재 상황이 외환위기의 시발점인 1994년 글로벌 경제 상황과 많이 닮아 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당시 불황에서 허우적대던 미국 경기가 활기를 되찾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확장적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급선회한다. 그러자 미국시장을 떠나 중남미에 둥지를 틀었던 외화자금이 이탈했고, 심각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적인 시장개입은 경계한다. 정부의 잦은 개입은 '환율조작국'이란 오명을 얻게 할 수 있고, 자칫 '실탄'만 쓰고 투기세력에 구실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응카드로 추가 금리 인하를 얘기한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통화정책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환율만 볼 수는 없겠지만 최근 같은 상황에선 통화에 대한 방향성이 정책에 반영돼야 할 때"라면서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할 때 엔화 가치 하락(엔저) 등 환율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엔화 가치 하락에 대응하려면 우리나라 기준금리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 연구위원은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수준이 될 정도로 적정한 환율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며 "당분간 기준금리 인하 등 확장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기본이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주체들이 엔저 등을 직면한 경제 여건으로 인식해 다각적 방법을 강구하고 대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품질과 서비스, 브랜드 등 경쟁력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는 것.
kmh@fnnews.com 김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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