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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원로에게 듣는다] 강봉균 前 재정경제부 장관 "한국 금융 낙후된 건 관치 탓"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2.31 17:56

수정 2014.12.31 20:26

박근혜정부 구조개혁 성공하려면 국민 공감대부터 얻어야
비정규직 위한 재원, 정규직 지원 줄이는 개혁과 함께 해야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박범준 기자

"재정개혁이 빠진 건 실망스럽다. 국가부채가 증가하는 데는 언론과 국민의 책임도 크다"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정규직이 가진 걸 나눠야 한다."

그는 최근엔 인터뷰를 자제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구조개혁 추진 방안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분야 구조개혁을 새해 경제정책방향의 핵심 축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직후였다. 불과 한두 시간 내 작성했을 법한 정부의 구조개혁방안에 대한 그의 자필 분석 메모는 A4 9쪽에 달했다. 일목요연하게 풀어내려간 메모는 30여년 경제관료로서 정통코스를 밟아온 그의 관록과 혜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과정의 산증인이자 외환위기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를 이끌며 기업 구조조정의 사령탑 역할을 한 3선 의원 출신의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장관. 그는 과거 구조조정과 현 정부의 구조개혁 간에 어떤 데자뷔(유사성)를 본 것일까. 강 전 장관은 "정부가 구조개혁에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개혁추진의 동력으로 국민적 공감대부터 얻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인터뷰는 세밑 경기 성남시 강 전 장관 자택에서 진행됐다.

―'개혁은 피를 먹고 산다.' 반발과 어려움이 따른다는 걸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말 아닌가. IMF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경험에 비추어 박근혜정부의 구조개혁 성공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다. 15년 전 IMF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은 30여년간 쌓아올린 국가경제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의식을 가졌었다. 구조개혁은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기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 개혁이 추진동력을 갖게 된다. 일례로 김대중정부 당시엔 정기적으로 '국민과의 대화'란 TV토론을 가졌다. 공감대 형성에 상당히 기여했다. 또 왜 개혁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추진과정도 투명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외환위기 당시엔 우리 경제가 젊고 관료사회도 강했다. 박근혜정부 임기가 3년 남았는데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하나.

▲우리 사회는 점차 대통령, 정부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드는 시대로 간다. 그러니까 분권화,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분권화의 대표적인 게 인사권이다. 사실은 책임장관제를 반드시 해야 한다. 개혁을 추진할 주체가 공직자인 경우가 많지 않나. 그러나 지금 공직사회는 굉장히 수동적이다. 전부 대통령 지시만 덮어놓고 베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통령 지시를 신이 나서 밀고갈 주도세력이 없어지게 되는 거다. 빨리 탈피해야 한다.

―집권 3년차의 구조개혁 지향점은.

▲구조개혁은 잠재성장률을 올리기 위한 것이다. 사실 정권을 막 잡았을 때 인수위 같은 곳에서 아주 강도 있게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소위 복지공약 약속을 지키겠다는 심리적 부담으로 어떻게 하면 복지공약을 제대로 추진할지 재원 마련에 온통 골머리를 앓았다. 지하경제 양성화, 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공허했던 얘기라는 게 증명되지 않았나. 비정상의 정상화, 무거운 과제다. 이 진통 과정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 여러 정권에서 일해 보니 5년 단임제의 특성상 개혁추진 동력은 잔여 임기에 비례한다. 정부가 문제의식을 갖고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 높이 평가한다. 지금이라도 착수해 남은 임기 3년간 개혁의 기본틀만 완성해도 이 정권의 큰 업적이 될 것이다.

―4대 구조개혁 부분 중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가장 어렵고 격렬할 것으로 보이는데.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경직성을 완화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단계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지금처럼 경영진이 적자 상황에서도 정규직에 대해 손을 못댄다? 이건 너무 경직적이다. 비정규직 보호나 지원을 위한 재원은 정규직에 대한 보호나 지원을 줄이는 개혁과 동시 추진해야 한다. 재야와 소통이 잘된다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동시장 개혁만큼은 밀어붙여선 안된다는 걸 알고 노사정위원회를 장관급으로 만들어 대타협을 시도했다. 당시도 민주노총은 참여를 거부했다. 주요 대기업들의 노조를 장악하고 있는 민노총이 참여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민노총도 이제는 국가 전체 장래를 보는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

―정부가 금융분야 구조개혁 방안을 내놓긴 했는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개혁은 더 이상 지연해선 안된다. 한국 금융은 관치운영체제를 탈피하겠다는 개혁정신의 실종으로 경제의 선순환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돈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요인이다. 금융이 낙후된 건 관치 탓이다. 근본적으로 금융 거버넌스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 금융기관 수장 인사에 이런저런 잡음이 나오는 건 금융이 자율적인 거버넌스 시스템을 못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민영화한다고 했던 게 언젠데 아직 안하고 있다. 우리금융이나 KB금융 사태를 보면 정부가 관치금융에서 손을 떼기가 싫다는 방증밖엔 안된다. 이를 개혁하지 않고선 금융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는다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정권들이 금융에 대한 권한을 놓기를 싫어한다. 과거 얘기를 하자면 김영삼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그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대신할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만들라고 했다. 요지는 관치에서 시장경제로 넘어가는 거라고 하더라.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보였던 내가 신경제 5개년 계획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갔다. 제1번을 관치금융 철폐로 하자고 했더니 그걸 빼라고 하지 않던가. 금융을 계속 정부통제하에 두면서 무슨 시장경제, 신경제라고 하느냐 대판 싸우고 나왔다. 금융을 장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었던 거다.

―미국의 금리인상 등 대외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계기업 중 규모가 있는 기업이 쓰러질 경우 외환위기와 같은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산업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마인드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금융기관 자체적으로 채권단 협의체를 만들고 금융이 산업현장에 들어가서 살려야 할 기업과 도태시켜야 할 기업을 살펴봐아 한다. 금융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져야 한다.

―최경환 경제팀이 새해 화두로 제시한 4대 구조개혁안 중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재정개혁이 빠져 실망스럽다. 이 정부 들어와서 재정개혁 한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다. 재정개혁은 정부가 확고한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건데 이를 빼놓고 개혁과제를 잡은 것 자체가 난센스다. 복지재원 조달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일부러 표면화하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국회도 정부가 제출한 예산에 무슨 사업을 끼워넣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지, 줄이는 데는 고민이 없어 보인다. 지방정부도 절약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노력을 해야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겠나. 재정을 푸는 건 좋다. 그러나 적어도 건전재정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고삐 푼 것처럼 계속 늘게 하는 건 무책임한거다. 언론과 국민의 책임도 크다. 비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재정개혁만으로 복지재원 충당이 가능한가.

▲우선 근본적으로 지출구조를 바꿔서 복지재원을 최대한 만들어보고 안되면 실효성 있는 세수증대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증세 얘기인가.

▲보편적 복지엔 반드시 보편적 증세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갈 길은 빚을 늘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복지공약을 못 지키든가다. 국민들은 재정적자가 늘어나도 당장은 부담이 되지 않아 무디지만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다. 증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판단을 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물가안정 상태에선 부가가치세 인상을 검토해볼 만하다. 유럽의 경우 단계적으로 복지를 늘리면서 부가세를 계속해서 올렸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으로 민간임대주택시장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규제가 문제다. 과거 우리 주택시장 정책은 서민들 집 갖게 하고, 부자들이 주택을 투기수단으로 삼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기서 완전히 환골탈태해야 한다. 주택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소위 임대사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철학부터 바꿔야 한다. 집 짓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짓게 하고, 선진국처럼 은퇴자들이 노후대책으로 집을 사서 세 놓을 수 있도록 다 풀어줘야 한다. 임대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투기꾼으로 몬다든가 세금으로 다스려서는 안된다. 1가구 다주택 중과세 규제 그런 건 이제 그만해야 한다.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혁을 추진 중이다. 군인연금과 사학연금은 개혁추진 계획을 번복했다.

▲개혁의 반발심리를 너무 낙관적으로 본 거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단순히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만 목표를 둬선 곤란하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공직사회의 청렴성 확보와 노후생활 안정이다. '더 부담하고' 적정 수준의 연금을 받도록 해야 한다. 국민연금 역시 마찬가지다.

―기업 투자 활성화를 끌어내는 게 사회적 화두인데.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하려면 지자체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고 환경단체, 지역주민들도 상대해야 한다. 대기업들이 미국 등 해외에 나가서 투자할 때는 그 나라에서 큰소리 치면서 한다고 하지 않나. 투자에 필요한 걸 일괄처리해주는 시스템 마련 등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기재부가 발표한 기업 신사업 재편 원샷 지원은 매우 잘하는 개혁 추진이다.

―금리정책이 초미의 관심사다.

▲대외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게 맞다. 일본, 유럽연합(EU)은 제로금리를 운영하고 심지어 중국도 금리를 낮추지 않나. 지난 4~5년간 한국은행은 금리에 대해 너무 경직적이었다.

―지금 우리 경제의 시침은 어디쯤 와 있나.

▲일본의 뒤를 따라가지 말자.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따라가고 있다. 과잉 복지공약으로 정부가 빚내는 것이나 구조개혁 과제, 국가규모에 비해 경쟁력을 못 갖춘 금융, 이민정책에 소극적인 것 등등이 일본 따라가기다.

―대외경제협력은 어떻게 가져가야 한다고 보나.

▲내 지론은 한·중·일이 중심이 되고 아세안이 참여하는 동아시아경제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거다. 한·일 관계는 정경분리를 해서 경제분야에서는 결코 소원해져서는 안된다. 또 경제공동체에 북한도 참여시키면 한반도 문제는 자동 해결된다. 혼자 놔두면 (북한이)핵을 포기하겠는가.

ehcho@fnnews.com 조은효 김승호 기자

■강봉균 전 장관은

3선 의원을 지낸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장관(71)은 합리적인 중도성향의 경제원로로 평가된다.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일곱번이나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의 첫 직업은 교사였다. 가정 형편상 대학에 가기 어려웠던 그는 군산사범학교를 택했다. 졸업 후 전북 고창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3년여간의 교원생활을 두고 그는 순수하고 꿈 많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 추억 때문인지 그의 애창곡은 '섬마을 선생님'이다. 교원 생활을 병행하며 주경야독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4학년때인 1969년 행정고시(6회)에 합격, 공직에 입문했다.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3~7차)입안을 관여·주도했다. 경제기획원 국장 시절 현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같이 일한 인연이 있다. 지난해 7월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최 부총리가 경제수장으로 내정·발표됐을 때 "관료 출신으로 거시경제를 잘 알고 정치경력까지 겸비한 적절한 인사"라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김영삼정부에선 노동부 차관, 경제기획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이어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정부에서도 기용돼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치며 재벌 개혁, 부실 기업 및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진념·이헌재 부총리와는 외환위기를 극복한 드림팀 4인방으로 회자된다.
현재는 경제기획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 등 경제 부처 출신 전직 관료들의 모임인 재경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약력 △서울대 경영학 학사 △윌리엄스대 경제학 석사 △한양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6회) △노동부 차관 △경제기획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 △16·17·18대 국회의원 △재경회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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