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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연말정산 파동이 놓치고 있는 것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2.03 17:27

수정 2015.02.03 17:27

[노동일 칼럼] 연말정산 파동이 놓치고 있는 것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책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에서 10만부 남짓 팔린 철학서가 한국에서는 130만부(일부 주장은 2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책의 내용이 좋아서? 아무리 쉽게 쓰였어도 철학과 윤리에 관한 딱딱한 이야기다. 독자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할 그 무엇이 담겼을 리 없다. 출판사의 마케팅 덕분에? 마케팅을 통해 잠시 베스트셀러를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100만부 이상 팔린 책이라면 마케팅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얼마 전 책을 출판한 한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였다. 베스트셀러를 기원하는 친구의 덕담에 지인은 작은 출판사라 마케팅력이 약해서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진 대화가 '정의란 무엇인가' 이야기였다. 지인은 샌델의 책이야말로 마케팅 전략이 성공한 좋은 예라고 분석하고 나섰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못(안)된다면 내용 때문이 아니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 정도로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 친구가 정색을 하며 꺼낸 말이 '마케팅 이상의 그 무엇'이다. 대형서점의 진열대나 언론의 책 소개란을 점령할 수 있는 마케팅의 힘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마케팅만으로 일종의 신드롬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정의'에 대한 갈망이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려있고 샌델 신드롬은 그 결과물이라는 게 친구의 진단이었다.

최근의 연말정산 파동을 보면서 떠오른 이야기다. 국민의 분노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잘못 때문일까. 청와대·정부·여당이 정책협의를 강화하면 해결될까. 정부와 여당이 부랴부랴 원칙에 어긋난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국민이 분노한 것은 단순히 홍보 부족 때문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분노 저변에 깔린 '그 무엇'을 잡아내지 못하면 근본적 해결책은 요원하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바로 그 무엇이다.

고위층, 재벌가 등의 병역면제율이 일반 국민의 몇 배에 이른다는 통계는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보수정권인 이명박·박근혜정부 고위층의 병역면제 비율이 유독 높은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다. 연말정산 파동은 이런 '불공정함'의 느낌을 세금 문제에 있어서 확인한 것이다. 연말정산 방법 변경으로 유리지갑인 봉급쟁이의 세금은 대폭 늘어났다. 하지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호화생활을 하는 고소득 전문직 혹은 자영업자, 자산소득자 등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고사하고 세금부담의 형평성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기름을 부은 것은 정부의 거짓말이다. 세금이 늘어도 한사코 증세가 아니라는 궤변으로 일관한다. 지난해보다 더 많이 뗀 게 분명한 데도 적게 떼고 적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오죽하면 여당 대표가 '증세 없는 복지'라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홍보를 잘하고 솔직한 것만으로도 점수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근본적 인식을 치유하지 못하면 문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미국의 인권변호사인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가난(poverty)의 반대말은 부유함(wealth)이 아니라 정의(justice)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부자들 혹은 부유함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혹은 그 결과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라는 말이다. 연말정산에서 돈 몇 푼 더 돌려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가난의 반대말이 정의라는 말부터 새겼으면 싶다.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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