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84)라는 이름 석자에는 한국 단색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1967년 첫 작품을 내놓은 이후 지금까지 계속 작업을 펼치고 있는 '묘법(描法)' 시리즈는 그가 그림을, 혹은 그림 그리는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감없이 보여준다.
'묘법' 시리즈에는 우리의 전통과 현대성이 동시에 녹아 있다. '묘법'은 단조로운 행위만 되풀이되는 지극히 단순한 세계이지만 거기에는 동양의 선(禪)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무위자연의 세계관과 자기성찰의 과정이 깔려 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묘법'은 "그림은 마음을 비우는 행위이며 수신(修身)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의 지론을 캔버스 위에 실천한 결과물이다.
그가 1996~2001년 제작한 '묘법' 시리즈와 이들 작품의 바탕이 된 '에스키스(esquisse) 드로잉'을 선보이는 '박서보의 묘법:에스키스-드로잉'전이 11일부터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린다. 에스키스 드로잉은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일종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말하지만, 이들 작품을 단순한 밑그림이나 설계도로만 볼 수는 없다. 평판 크레용과 연필 등을 이용해 작업한 에스키스 드로잉들은 상하좌우에 어느 정도의 간격이 필요한지 등을 자로 잰 듯 단정하고 반듯하게 그려놓고 있어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이번 전시의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김용대는 "박서보의 에스키스 드로잉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지난 2002년 이후 이번이 두번째"라면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는 본 작업과 그것을 압축해 보여주는 에스키스 드로잉은 철로의 양쪽 레일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02)732-3558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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