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김훈, '남한산성')
병자호란을 피해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에게 이조판서 최명길이 아뢴 말이다. 인조의 곤궁한 처지를 한마디로 말해준다. 결국 인조는 산성을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항복의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장면일 것이다. 아다시피 스스로 불러들인 치욕이었다. 인조에 앞선 광해군의 외교목표는 분명했다. 기울어가는 명(明)나라와 떠오르는 후금(청)의 패권다툼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소용돌이 치는 시기에 일단 확실한 태도를 유보하는 것이었다. "명에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는 지킨다. 그러나 조선의 존망 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한다"(김명기, '광해군').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실리를 챙기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이 같은 광해군의 외교정책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명을 숭배하고 후금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확실히 하는 데 너무 빨랐다. 반면 침략을 당한 후 상황을 수습하는 데는 너무 느렸다. 신하들은 항복문서의 문구 하나에도 온갖 트집을 잡아 서로 비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동아시아 질서가 소용돌이 치는 시기를 맞는다. 17세기 조선이 직면했던 어려움과 유사한 외교적 문제들이 줄을 잇고 있다. 중국이 요구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 미국이 원하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이른바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AIIB는 일단 가입하기로 했지만 사드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은 단순히 돌출적인 사안들이 아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중국이 도전하는 패권다툼과 미.중.일 각축으로 인한 동아시아 질서의 지각변동이 본질인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의 말이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침략을 불러들인 것이나 수습과정에서 지리멸렬했던 원인은 우리 내부에 있었다. '밖으로 싸우는 것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 정도로 우리끼리 싸우고 또 싸웠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을 두고 말들이 넘친다. 전문가들의 조언, 고언, 의견, 비난 등이 봇물을 이룬다. 야당은 주로 사드 배치 문제에서 정부를 비판한다. 우리 외교의 모호함을 질타하는 의견도 있다.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비판이다. 굴욕외교라는 비난도 나온다. 모호성 대신 유연성을 택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솔직히 말해 어느 것이 확실하게 우리 생존과 국익에 유리한 선택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모호함과 유연함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엄중한 시기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우리 외교의 성과를 스스로 극찬하고 나섰다. "한.미, 한.중 관계를 역대 최상의 수준으로 만들었다"며 "우리 다자(多者) 외교와 국제회의 외교도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말대로라면 충심으로 박수를 칠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언질과 태도를 끝까지 유보하는 걸 가리켜 이른바 '외교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실력은 병자호란 때보다 많이 나아졌는가. 글깨나 읽는다는 사람들의 말들은 그때와 달라졌는가. 싸움 대신 지혜를 모아가는 말들이 절실한 시기이다.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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