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금융일반

장애인, 애매한 대출규정 탓에 '속앓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5.31 16:53

수정 2015.05.31 21:55

신체장애만 앓는 소비자, 심신 박약 금치산자 분류 대리인 없으면 대출 불가




#. 뇌성마비 1급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K씨는 내년 결혼을 앞두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A은행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기업체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K씨는 연체된 채무도 전무한 터라 당연히 신용대출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출은 커녕 대출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외관상 의사능력 유무를 판단하기 힘들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A은행 해당 지점에선 "사실상 행위능력자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법정 대리인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지만, K씨는 "신체가 불편할 뿐인데 지적장애자와 동일하게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처럼 심신 미약자로 분류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대출 신청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말이 되냐"며 항변했다. 실제 K씨의 경우 구두 대화는 어려우나 SNS 등을 통한 소통 능력은 문제가 없다.

뇌병변장애인에 대한 은행권의 모호한 대출 규정이 논란을 빚고 있다. 사지마비·뇌성마비 등 뇌병변장애처럼 신체장애만을 앓고 있는 금융소비자들을 지적 능력이 낮거나 심신능력이 박약한 금치산자·한정치산자 등으로 분류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금치산자란 심신 상실의 상태에 있어 자기 재산의 관리나 처분을 금하도록 법원의 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한정치산자 역시 심신이 박약하거나 낭비가 심해 재산 관리 및 처분에 제한을 받는 사람으로서 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지만 금융거래 등을 할 수 있다.

통상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 모두 정상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호자의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

지난 2013년부터는 한정치산자의 경우 거액의 금전차용 등에 대한 중요 법률행위에만 예외적으로 후견인의 동의를 받도록 '한정후견제'로 대체됐으며, 독자적인 모든 법률행위가 불가하던 금치산자는 일용품 구입과 같은 일상적 행위마나 독자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성년후견제'로 바뀌었다.

■모호한 장애인대출 규정 때문에

5월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에선 여신취급을 위한 대출 규정상 신체 장애인에 대한 대출 거부 조항이 없다.

다만 민법상 무능력자에 해당하는 금융소비자에 대해선, 은행 내규로 법정 대리인을 통한 대출신청 및 금융거래가 가능하다.

문제는 '의사능력여부'에 따른 명확한 세부 기준(규정)이 없어 신체장애를 앓고 있는 금융소비자들도 행위무능력자로서 법정 대리인이 없으면 대출이 불가하다는 점이다.

최근 B은행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P씨 역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지만, 지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

P씨는 "몸이 불편해 자필서명은 어렵지만 키보드 자판으로 칠 수도 있고, 지장도 찍을 수 있다"면서 "의사가 어렵다고 지적 능력까지 낮은건 아닌데, 대리인까지 동행하라는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B은행 해당 지점에선 "장애인에 대한 별도의 차별은 없지만, 아무래도 돈이 오고가는 문제다보니 여신 취급상 고객의 소득이나 상환계획 등을 검토해야하고 직원이 직접 대화로 의사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부분"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신한·KB국민·하나·IBK기업·NH농협·외환은행 등을 대상으로 장애인 대출과 관련된 내부 규정을 살펴보면 "신체 일부 장애를 앓고 있는 금융소비자는 일반 정상인과 동일하게 보고 금융거래를 진행한다. 다만 심심 미약자나 상실자 등에 해당하는 금융소비자는 법정 대리인이 있어야 여신 취급이 가능하다"는 대체로 일관된 항목이 있다.

이에대해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체 장애인에 대한 예금이나 통장발급 등은 무인이나 도장, 본인 작성이 어려우면 제3자를 통한 대필로 갈음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대출에 있어선 '의사능력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보니 가끔 신체 장애인도 지적 장애인과 동일하게 법정 대리인이 필요한 후견인을 동행해야 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고금리 대부업·사채로 빠지기도

결국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제도권 금융에서 밀려난 신체 장애인들은 고금리 대부업이나 사채를 이용할 밖에 없는 현실이다.

은행에선 대부분 "여신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일반인 대출도 상당히 예민하게 검토하고 있다보니, 장애인 대출은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일선 지점장은 "장애인 대출 규정이 모호하다보니 은행 입장에선 관련된 접수나 대출 진행을 꺼려하는게 현실"이라고 자성하면서도 "1금융권 고객 중 신체 장애인들이 극히 드물고, 일부 있더라도 제도권 금융 이용이 어렵다보니 어쩔 수 없이 대부업 등을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30대 C씨와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 40대 D씨 모두 시중은행 등을 통한 제도권 대출이 아닌 주로 대부업을 통한 대출을 이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C씨는 "신체장애인은 한정치산자가 아닌데 은행에선 한정치산자로 분류하는게 아이러니하다"고 말했다.


D씨는 "단지 말로서 대화가 어렵다고 수입이 없는 것도,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의사 무능력자로 치부하는 것은 차별"이라면서 "은행 대출은 꿈도 못꾸다보니, 여러번 거절당해 이제는 대부업 전화 대출을 주로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전했다.

gms@fnnews.com 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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