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의리·도리가 삶의 이유일 때가 있었지
"그리 말하지 말게. 자식을 버리는 내 심정은 오죽하겠나." "그깟 의리가 뭐라고,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깟 뱉는 말이 뭐라고, 남의 자식 살리고 내 자식을 죽여!"
동서고금에 내 자식을 희생시켜 남의 자식을 살릴 사람이 있을까. 영웅이나 성인(聖人) 쯤 되는 이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 하더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조씨 집안에 밥이나 얻어먹으려 드나들던 필부(匹夫)가 결연에 찬 목소리로 그리하겠다고 한다. 자신에게 침을 뱉으며 오열하는 아내의 품에서 기어코 자기 아들을 빼앗아 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 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에 앞서 언론에 먼저 공개된 국립극단의 연극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사진)은 연출을 맡은 고선웅의 말마따나 "의리, 도리, 말을 뱉은 것에 대한 책임이 없는 요즘 시대에 던지는 육중한 메시지"였다. 조씨 가문의 문객일 뿐이었던 정영은 공주의 아들 조씨 고아를 살려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아들의 목숨을 맞바꾼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신의가, 내 자식의 목숨과 같은 무게로 치환되는 것이다.
무거운 주제의식에 무려 16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쉬는시간 15분 포함)은 관객을 지치게 만들 법도 하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녹아있는 재치있는 대사와 극적 장치들이 연극적 재미를 극대화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칼로막베스' '홍도' '아리랑' 등을 통해 각색 능력으로 정평이 난 고선웅이 중국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조씨고아(趙氏孤兒)'를 각색·연출했다. 4년 전 이 작품을 읽고 연극성과 주제에 반해 국립극단에 먼저 공연 제의를 했다는 고선웅은 "과거에는 자신이 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지켜야 할 고결한 가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었다"며 "연극하는 사람으로서 이 작품의 형식적인 매력도 느꼈지만 그런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드높이기 위해 조씨 가문 300여명을 몰살시킬 음모를 꾸미는 도안고에 맞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의인 '한궐' '공손저구'의 의기는 비장미를 더한다. 이들의 희생을 등에 업고 정영은 조씨 고아, '정발'을 복수의 씨앗으로 키운다.
중국 원나라의 연극 형식인 잡극(雜劇)의 원형을 최대한 살린 무대는 '비어있음'이 특징이다. 뽕나무, 잘린 팔 등 최소한의 상황을 설명하는 몸집보다 작은 세트들이 무대 천장에 매달려 오르락 내리락하는 정도다. 막도 없고 암전도 거의 없어 관객에게 장면 전환을 그대로 노출한다. 동양 전통극에 등장하는 검은 부채를 든 묵자(墨子)가 인물의 퇴장과 소품의 이동을 알린다.
빈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은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다채로운 동선이다. 무표정한 슬픔은 슬픔의 크기를 극대화한다. 문을 여닫는 동작, 걸음걸이를 통해 건물의 내부와 외부, 구부러진 길이 눈앞에 보이듯 펼쳐진다. 재치있는 의성어의 사용도 돋보인다. 20년 세월을 '쿨럭쿨럭'이라는 기침소리로 뛰어 넘는다든가 개가 게걸스럽게 먹는 모양을 '우걱우걱'으로 표현해 듣는 재미를 더한다. 심각한 상황에서 다소 과장된 마임을 통해 긴장을 이완시키는 식의 강약조절도 일품이다. 2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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