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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9) 경기민요 명창 이춘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1.15 17:10

수정 2015.11.16 19:29

"나이 먹었어도 아직 배만은 단단해, 그만큼 연습을 했으니까"
열일곱 막내딸이 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어머니는 기생이 되겠다는거냐며 반대하셨지, 그러다 느닷없이 병이 났어. 노래를 못하게 하니까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아. 죽이느니 살리자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허락했지.
그렇게 배우고 싶던 민요도 고된 배움 생활에 1년을 버티다 그만뒀어. 6개월 후 또다시 마음이 가 열심히 하겠다고 빌며 들어갔지.
후회하고 마음 다잡기를 반복하며 8~9년을 보냈어. 죽겠다가도 노래를 하면 그렇게 좋은거야.
가난, 고통스러운 수련, 남편과의 이별.. 굽이굽이 모진 세월 견뎠더니 지금의 내가 있더라.
사진기자가 노래하는 듯한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자 이춘희 명창은 "어떻게 노래를 하는 척을 하나"라며 '아리랑'을 불러제꼈다. 그는 "아리랑은 슬픔과 한의 노래가 아니라 희망차고 힘이 나는 노래"라고 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사진기자가 노래하는 듯한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하자 이춘희 명창은 "어떻게 노래를 하는 척을 하나"라며 '아리랑'을 불러제꼈다. 그는 "아리랑은 슬픔과 한의 노래가 아니라 희망차고 힘이 나는 노래"라고 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앞마당에 느닷없이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사진기자가 노래하는 듯한 포즈를 취해 달라고 주문했을 때였다. "노래를 어떻게 하는 척을 하나" 궂은 날씨에 바람은 불고 관객도 하나 없는 야외에서, 대충 시늉만 할법도 한데, 이춘희 명창(68)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리랑을 불러 제꼈다. 텅빈 잔디밭은 곧바로 무대가 됐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거친 바람 소리를 뚫고 나왔다. 누가 아리랑을 슬픔과 한의 노래라고 했나. 그가 부르는 아리랑은 그의 말처럼 "희망차고 힘이 나는 노래"로 승화됐다. 가난의 설움, 고통의 수련, 이별의 아픔, 구비구비 모진 세월을 지나온 뒤였다. 견디다 보니 명창 소리도 듣게 됐고 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국가적으로도 인정받게 됐다. 한국을 넘어 세계도 그의 소리에 감탄했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던 프랑스 파리 현장에서 그가 부른 아리랑은 그 자리에 모인 각국 대표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고 지난해 5월에는 프랑스 국영방송국인 라디오 프랑스를 통해 출시한 '아리랑과 민요' 음반으로 독일음반비평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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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만난 이춘희 명창은 "여지껏 고생했던 게 씻은 듯이 사라지는 순간들이 있었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한이 아닌 안도감의 한숨이었다. 2시간 남짓한 인터뷰 중 그가 보인 세 번의 눈물은 세계의 명창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노래를 배우게 된 것부터가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춘희 노래 잘하는 건 온 동네가 아는 사실이었다. 가수가 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노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데 철없는 열 일곱 막내딸이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을 때 어머니의 대답은 차가웠다. "인물도 없는 네가 무슨 기생이 되겠다는 거냐." 노래를 배운다고 하면 어른들은 아직도 '권번'(일제강점기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조합)을 떠올리던 시대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병이 났다.

"노래를 못하게 하니까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아요. 싸고 토하고를 반복하고 죽네 사네 했죠. 병원에서는 약도 없다고 진통제를 놔줬어요. 맞으면 괜찮은데 일주일이 못 가서 또 아프고. 병원에선 더이상 맞으면 중독된다고 경고했어요. 죽이느니 살리자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허락을 하신거죠." 그렇게 처음 가요학원이라는 곳에서 배우게 됐다. 1년쯤 지나서 민요학원이 있다는 걸 알고 옮겨갔다.

―그 나이에 민요의 맛을 어떻게 알았나.

▲이상하게 민요가 좋았다. 길거리를 걸으면 유성기(축음기) 가게에서 민요가 흘러나오는 데 어쩜 그렇게 좋은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귀신이 부르는 것 같았다.

첫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타령 예능보유자로 당대를 이름을 날렸던 이창배 선생. 우리나라 명창 중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한 인물로 회자된다. 하지만 배운다고 저절로 되는 소리가 아니였다. 그 과정은 또 그렇게 고됐다. 버스 두 번 탈 거 한 번 타고 점심 메뉴는 가장 싼 짜장면만 먹었다. 희망도 없어 보였다. 지금이야 잘하면 TV에도 나가고 무대도 많아졌지만 그땐 아무것도 없었다. 끽 해봐야 잔칫집 축하무대에서 몇푼 버는 정도였다. 1년을 버티다 학원에 발을 끊었다. 6개월 후 궁금한 마음에 친구를 따라 선생님과 선배들의 공연을 보러갔다. "예쁜 옷을 입고 무대에서 노래하는 데 선녀가 따로 없더라고요. 그길로 다시 선생님을 찾아가서 열심히 하겠다고 빌었죠." 이후로도 후회하고 마음 다잡기를 반복하며 팔구년을 보냈다.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뭐였나.

▲죽겠다가도 노래를 하면 그렇게 좋았다. 경기민요의 야즐자즐한 맛이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눈 팔지 않고 20대를 보내다 보니 명창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춘희가 잘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박춘재, 이창배 선생과 함께 3대 경기명창으로 불리는 안비취 선생 밑에 들어간 게 그 즈음이었다. 안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던 1975년 이춘희 명창은 정식 전수생이 됐다. 그 때부터 "내 길은 이 거다"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안비취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

▲여걸이자 무대 위의 꽃이었다. 이창배 선생님이 학자 스타일이라면 안비취 선생은 활동가였다. 선생님의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이상하리만치 한국을 뜨거나 세상을 떠났다. 운명처럼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함께 살면서부터는 모든 걸 관리해주셨다.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안 선생은 말씨, 옷 매무새, 태도까지 인성을 가르쳐주셨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한번 지적받은 것은 다시 지적받지 않으려고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선생님은 칭찬을 거의 안하셨어요. 오늘은 또 무슨 꾸중을 들을까 조마조마했죠. 돌아가신 후에 알았어요. 제가 없을 때 제 칭찬을 그렇게 하셨대요."

이 명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제 공연에 오셨을 때는 무대에서 소리하다 울기도 했어요. 돌아가신 직후에는 매일 울고불고 했죠. 엄마같은 분이 떠났으니…. 가슴이 녹아내렸어요." 1997년 안비취 선생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에 뒤를 이어 이춘희가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됐다.

명창 소리를 듣게 되기까지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한 환경도 있었지만 의외의 복병은 자기 자신이었다. "무대 위에서 긴장에 짓눌리니 소리를 못하겠는 거에요. 숨이 차고 떨려서. 선생님께 '나 약 먹고 할까봐' 그랬어요. 불호령이 떨어졌죠. '아편쟁이가 되고 싶은 거냐!' 그러면서 부르다 울고 부르다 울고 그랬어요."

그는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2등을 했을 때를 평생에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으로 꼽았다.

―1등을 못해서 부끄러웠나.

▲3등 보다 못했는데 2등을 해서 부끄러웠다. 무대만 서면 제 실력이 안나왔다. 그날 정말 못했는데 평소 실력을 감안해서 2등을 줬던 것 같다. 그때 나를 뛰어 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19) 경기민요 명창 이춘희

▲극한의 상황을 만들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면서, 뛰면서 노래했다. 독주회를 하겠다고 마음 먹고서는 이를 갈고 훈련했다. 그걸 1년 하고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결국 떨리고 숨차는 건 연습 부족이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 해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악조건을 만들어가며 연습해야 한다.

매일 새벽 6시에 산에 오르면서 연습은 시작됐다. "하루에 10시간도 연습했죠. 유산가를 30번 부르면 딱 5시간이에요. 그러면 갈빗대가 다 아파요. 등줄기는 쪼개지는 것 같았죠. 그러다가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알이 찬 소리가 나왔어요. 그 상태로 며칠을 노래해도 되겠더라고요. 그 때 희열은 잊을 수가 없어요.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었죠."

1986년 첫 독주회였다. 그는 연도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무대공포증을 이겨내고 진정한 명창 소리를 듣게 된 게 그때부터였다. 그 전에도 국악계에서 잘한다 소리 깨나 들었지만 실전에 약한 탓이었다.

현재 경기민요 명창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많지만 이춘희 명창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잡티 없는 고음과 탁월한 성량, 미세한 음처리, 빈틈없는 완결성까지, 흠 잡을 데가 없다는 평가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배는 주먹으로 쳐도 아프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내가 지금은 나이 먹어서 살이 빠지는데 배만 안 빠져. 아주 딱딱해요. 호호."

훈련만 하기에도 치열한 삶이었는데,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은 그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한창 일할 나이였던 서른 둘에 낳은 딸 서정화(38) 얘기를 하며 이춘희 명창은 많이 울었다. 서정화는 경기민요 이수자이기도 하다. "걔를 생각하면 내가 맨날 죄인이야. 지금도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기보다 차가운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 가슴 아파요. 따뜻하게 잘 못해줬어요. 그땐 집에 들어오면 쉴 생각밖에 안났지. 너무 고단하니까. 지금 같았으면 안그럴텐데…."

눈만 뜨면 학원에 나갔다가 밤 9시는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밖으로 나는 건 반대했다. 나이 마흔에 남편과 헤어진 이후 그는 "세상이 내것 같았다"고 했다. "새 사람을 만나는 건 내 인생에 없는 과제예요. 내 인생의 최대 과제는 후학 양성. 눈만 뜨면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죠."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사명감이다. 물론 무형문화재 보유자라면 전수생을 2명씩 둬야 할 의무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가르쳤다.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제자만 스무명은 된다. 보통 한두명 키우기도 어렵다. 강효주, 서정화, 이희문, 김진찬, 권정희, 앵비 등등이다. 앵비는 내가 결성해준 5인조 걸그룹이다. 소녀시대만큼 예쁘고 잘한다. 모두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다.

―국악 대중화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로 있을 때 경기소리극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민요로 만든 뮤지컬이다. 맨날 똑같은 무대 지겹지 않은가. 재미가 있어야 관객들이 올 것이고 와서 봐야 국악이 재밌는 걸 알 것 아닌가. 꾸준히 공연할 수 있는 소리극단을 만들고 싶다.
국악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꿈이다.

열 여덟에 시작한 소리인생 50년. 죽기 살기로 시작한 소리는 그에게 목숨과 같은 의미였다.
"소리의 길에는 그렇게 사연이 많았어요. 파도같은 삶이었죠. 가정을 지키지도 못했고. 소리에만 미쳐서…. 그래도 그렇게 하다보니 웃을 날이 오더군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게 맞아요." 마지막으로 흐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이춘희 명창 프로필

△68세 △서울 출생 △한라문화제 대통령상 △KBS 국악대상 △1994년 첫 정규 앨범 이춘희 민요가락 발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지도위원 △제23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부문 대상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지정 △1998년 최초의 경서도소리극 '남촌별곡' △제32회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국민훈장 화관문화훈장 △60주년 음반발매 기념콘서트 '소리로 빚은 삶 60' △한국국악협회 이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국립국악원 대표브랜드 소리극 '언문외전' '까막눈의왕-세종어제훈민정음'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 '아리랑' 실연 △독일음반비평가상 수상 △조선일보 '방일영 국악대상' 수상 △광복 70주년 기념공연 '월드뮤직 아리랑' △한국전통민요협회 이사장 및 한국전통예술학교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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