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위한 1년의 '갭이어'..안되는 걸까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31 15:41

수정 2016.01.31 16:06

“지금 안 해보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요.” 이영석씨(가명, 23)는 음악이 적성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삼수를 거쳐 이른바 ‘명문대’ 공대에 입학하기까진 이를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지금 휴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음악에 온전히 시간을 써 보고 싶어서다.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지는 ‘해 봐야 아는’ 일이다.
그런데 부모님께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삼수까지 지원을 받았는데 또 ‘늦어지게 됐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지 막막하다. 2년의 군 복무 기간이나 어려운 취업환경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씨는 ‘갭이어(Gap year)’를 가질 수 있을까.

스스로를 위한 시간, ‘갭이어’를 고려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갭이어는 원래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진로를 탐색하는 1년의 시간을 의미했다. 요즘은 학업이나 직장을 쉬면서 원하는 일을 해 보는 기간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대학생들이 ‘휴학’하는 방식으로 이 시간을 내는 경우가 많다. 휴직을 내거나 이직 전 틈을 이용해 갭이어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찾는 시간’ 갈구하는 사람들
이재범씨(27)가 “휴학하겠다” 선언했을 때 어머니 김은숙씨(55)는 그야말로 ‘펄쩍’ 뛰었다. 수능점수에 맞춰 간 사회복지학과가 맞지 않다던 아들이 그래도 잘 적응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를 바라온 터였다. 아들의 졸업이 1년 늦어지면 부부의 노후준비도 그만큼 길어질 터였다.

하지만 손재주가 좋은 아들이 1년여를 프라모델(조립식 모형 장난감) 가게에서 일한 후 다시 기술 전공을 택한 데 지금은 매우 만족한다. 이씨도 휴학 결정을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뚜렷한 미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원하는 걸 해 봤기에 더 맞는 공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랴, 일하랴'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갭이어로 채우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이 틈을 파고드는 전문 업체도 나왔다. ‘한국갭이어’는 ‘제주도에서 1년 살기’ 부터 ‘이탈리아에서 예술 공부하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상담을 통해 고객의 욕구를 파악한 뒤 적합한 프로그램에 다리를 놓아주는 식이다. 대학생과 직장인이 주로 찾는다.

■이마저 ‘스펙의 시간’으로..
하지만 이런 시간을 내는 건 대개 ‘용감한’ 일이 된다. 주변에 계획을 밝히면 “그럼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이 따라 나온다. 갭이어를 원하는 이들은 막상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하니 ‘도태될까 두렵다’고 말한다.

의학전문대학원을 마치고 인턴 과정 졸업을 앞둔 이은정(가명,30,여)씨도 이 경우다. 곧이어 레지던트 과정을 밟기 어렵게 된 이씨는 이참에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기타를 배우고 여행을 다니며 '모험'을 시도하는 건 잠을 쪼개가며 '일과 공부'만 한 이씨의 오랜 꿈이다.

그러나 막상 졸업이 다가오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경쟁은 치열해져만 가는데 이듬해 자신의 '빈 1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취업문을 뚫을지 막막해졌다. 동기들도 모두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력서 한 줄이라도 채우기 위해 요즘 “우간다에 가서 의료봉사라도 하고 올까 생각한다”는 이씨는 “이런 불순한 마음으로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 삶을 도모하는 이들 가운데는 처음에는 여행이나 취미활동을 열망하다가도 결국 이력을 생각해 어학연수나 공부로 방향을 트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갭이어’의 안시준 대표는 “갭이어를 성공적으로 보내려면 ‘뚜렷한 주관’이 중요하다”면서 “본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스펙’인지 아니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인지를 뚜렷이 해야 진정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팍팍한 현실..대다수는 '꿈도 못 꿔'
실상 ‘스펙’ 때문에 과감해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축에 속한다. 학비나 생계 때문에 일로 내몰린 대학생들은 ‘갭이어’는 꿈도 꿀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생 김아현씨(23,가명,여)는 “한 학기 휴학해 번 돈으로 한 학기를 다니는 와중에 ‘내가 원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취업준비 중인 대학생 유현정(27,가명,여)씨는 "휴학한다면 취업에 도움되는 일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했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홍후조 교수는 “가뜩이나 대학 와서야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방황하는 학생이 많은데 생활비를 벌기위해 휴학하는 경우까지 늘어나 학업이 단절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제주대 교육학과 김대영 교수는 “(대학생들이) 진로 탐색을 한다기보다 1~2학년 때는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휴학을 하고, 3~4학년 때는 취업준비 때문에 휴학을 하는 사례가 많다”면서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잘 대우해주는 우리 사회 구조가 학생들의 선택권을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mrchoi@fnnews.com 최미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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