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 "수입 줄더라도 저녁 있는 삶이 더 좋아"
레미콘·건설사는 난색.. 공사기간 맞추기 어려워
불량 레미콘까지 동원돼.. 부실공사 등 부작용 유발
#1.이 건설 현장은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5시 30분에 끝난다. 요즘은 5시만 되도 레미콘 차량이 들어오지 않는다. 마곡 지구의 대부분 레미콘 차량은 8.5제 내용이 들어간 현수막을 붙이고 다닌다.(건설업체 직원)
레미콘·건설사는 난색.. 공사기간 맞추기 어려워
불량 레미콘까지 동원돼.. 부실공사 등 부작용 유발
#2. 예전에는 새벽 4~5시에 나와서 일했지만 올해 1월부터는 8시에 시작한다. 오후 5시 1분이면 짐 싣는 게 끝난다.
연초부터 레미콘시장에서 '레미콘 차량 8.5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8.5제란 레미콘 차주.차량 운전자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제도다. 올초부터 레미콘 차량 운전자들은 "저녁있는 삶 달라"면서 8.5제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레미콘사와 건설사들은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레미콘사와 건설사들은 8.5제 시행으로 인해 건설 공기 지연, 물량 부족으로 인한 불량 레미콘 공급, 비용 부담 증가 등의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레미콘 운전자, "저녁 있는 삶이 좋다"
22일 찾아간 마곡지구 건설 현장의 레미콘 차량들은 대부분 전면에 8.5제 시행 플랭카드를 붙인 채 운행을 하고 있었다. 이들 차량에 붙은 플랭카드에는 '2016년 1월1일부터 8시간 정착으로 레미콘 유통질서 확립하고 저녁은 가족과 함께!!(대한건설기계사업자총연합회)'라고 씌여있다. 레미콘 차량들은 8.5제 시행에 대한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셈.
이날 만난 레미콘 차량 운전자는 "8.5제는 민주노총에 가입이 돼 있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면서 "전국레미콘연합회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입이 줄어들지 않는냐는 우려에 대해선 "그전에는 오후 4시든 밤 10시든 상관없이 항상 대기하다가 건설현장에서 끝났다고 해야 일이 끝났다"면서 "일을 늦게까지 할수록 더 버는 것은 있지만 그걸 포기하더라도 저녁을 애들하고 보내는 게 더 좋다"고 들려줬다.
아직 레미콘 차량 구입 대출이 남아 있다는 또다른 차량 운전자는 "대출을 빨리 갚으려고 하면 일을 더 해야 하지만 운반비를 올려주지 않으면 마찬가지"라면서 "어차피 배 고픈 건 마찬가지라 오후 5시까지만 일하는 게 더 낫다"고 주장했다. 레미콘 차량은 지입차 운영 비율이 높다. 업계에선 80~90% 가량으로 보고 있다. 지입차는 장시간 일해도 운반비를 올려주지 않는 한 실질적인 수입은 크지 않아 8.5제가 차라리 낫다는 것.
■레미콘사.건설사, 난색 표명..."비현실적 행태"
레미콘을 건설현장에 공급하는 레미콘업체들은 레미콘 차량 운전자의 8.5시행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레미콘업체들은 곳곳에서 수시로 이뤄지는 건설현장의 레미콘 공급 요청에 레미콘을 8.5제 범위 안에서 공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레미콘업체 관계자는 "8.5제의 본격 시행으로 레미콘 업체들도 비상"이라며 "고객인 건설사로부터 클레임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또다른 레미콘업체 관계자는 "올 들어 매일 전화에 불이 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레미콘 차량 대부분이 자차가 아니라 지입차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건설업체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레미콘 물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면서 공사 기간이 예정보다 늦춰지고 있어서다. 건설현장의 특성상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기란 어려워 레미콘 차량 운전자의 8.5제는 수용하기가 어렵다는게 건설업체의 반응이다.
■함량 미달 레미콘 사용해 부실 공사 유발
문제는 8.5제 시행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당장 8.5제로 인해 건설 현장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건설업체들의 경우 피해가 커질 수 밖에 없다. 벌써부터 일부 건설사들이 공기에 쫓겨 KS 규격에 맞지 않는 함량 미달의 레미콘을 요구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함량 미달의 레미콘을 사용해 건설할 경우 원가를 줄일 수는 있지만 건물의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 피해는 고스란히 입주민에게 돌아갈 수 있다. 레미콘 차량 운전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시행되는 8.5제가 제 3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레미콘업계 관계자는 "건설사가 '갑'인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아예 물량 자체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량 미달의 레미콘을 공급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레미콘업계 관계자는 "대형 레미콘사들과는 달리 영세 레미콘 업체들은 원가가 싼 재료들로 레미콘 배합 비율을 맞춰 제공해 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면서 "결국 그 피해는 입주민이나 입주기업들이다"고 우려했다.
yutoo@fnnews.com 최영희 기자 김진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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