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쓸쓸한 절터에 서면.. 흥망성쇠 지켜본 탑들이 속삭이네

이정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2.25 16:52

수정 2016.02.25 22:26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 물씬 느껴져..승려 수천명이 수행했다던 성주사
3월에 가볼 만한 곳  '양주·원주·보령 폐사지'

폐사지(廢寺址)는 휑하다. 사찰이 무너진 자리에 주춧돌과 석탑만 남아 쓸쓸하고 아련하다. 그 휑한 자리에 지나온 긴 세월과 역사의 흔적이 묻어 있다. 폐사지에 얽힌 애잔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한국관광공사는 '지금은 사라진 옛 절터, 폐사지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경기 양주 회암사지, 강원도 원주 남한강 절터, 충남 보령 성주사지 등을 선정했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돌덩이가 속삭이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양주 회암사지 깊숙이 자리한 부도
양주 회암사지 깊숙이 자리한 부도

■조선 최대 왕실 사찰 양주 회암사지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예전 세상과 그곳에 산 사람, 그들의 꿈을 만나는 독특한 여행이다. 경기 북부의 유서 깊은 고장 양주에는 고려 중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 회암사지가 있다. 창건 연대도, 언제 어떻게 폐사됐는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관련 기록과 건축양식, 출토 유물로 미루어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으리라는 것이 짐작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보니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겠지만,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오랫동안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를 회암사 주지로 보내고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회암사 창건 시기를 고려 중기로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4년(1174년)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다녀갔다고 나온다. 한편 이색의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는 회암사의 건물 구조와 배치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는 건물이 260여채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사찰이었다.

사찰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을 결합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를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중 하나다. 남북으로 층층이 단이 있고 남쪽에 회랑을 둔 점은 고려시대 궁궐 건축양식과 같다. 또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배치하되, 가장 북쪽의 정청과 동방장, 서방장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 형식을 적용했다. 보광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 앞에는 의식과 경연 공간인 월대가 조성돼 있는데, 이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같은 궁궐의 중심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아쉽게도 회암사지는 발굴 조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신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와 박물관에서 절의 규모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회암사지박물관 1층에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회암사 모형이 있다. 이 모형과 재미있는 영상을 통해 회암사의 역사와 가치를 쉽게 알 수 있다.

원주 거돈사지 입구에서 본 거돈사지 삼층석탑
원주 거돈사지 입구에서 본 거돈사지 삼층석탑


■왕의 스승이 머물던 원주 남한강 절터

강원도 원주는 치악산국립공원과 강원감영, 한지 등으로 이름난 고장이지만, 폐사지 답사를 빼놓을 수 없다. 서쪽 남한강 자락의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가 대표적이다. 세 사찰은 대략 신라시대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불탄 천년 고찰들이다. 특히 고려시대 왕의 스승인 국사들이 머물며 전성기를 누렸다. 빈터에는 국사나 왕사의 탑이나 탑비가 역사를 증언한다. 국보, 보물급 문화재다.

답사보다 고즈넉한 폐사지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는 거돈사지가 으뜸이다. 흥법사지는 발굴 전이라 허전하고, 법천사지는 발굴 중이라 어수선하다. 그에 반해 거돈사지는 말끔하게 정돈된 폐사지다. 여행자들이 생각하는 모습에 가장 가깝다. 폐사지가 첫 방문인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거돈사지는 문막IC나 원주 시가지에서 섬강을 지나고 남한강을 거슬러 다다른다. 동쪽에 정산저수지가 있어 과거 사찰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석축과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고찰은 4~5m 옹벽 위에 지어 길에서 보이지 않고, 남서쪽 석축 위의 느티나무만 가지를 내려 인사한다. 고목은 뿌리가 석축 사이를 파고들어 마치 돌을 움켜쥔 듯하다. '돌을 먹고 사는 나무'라 부르는 이유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석축 가운데로 계단이 나 있다. 거돈사지는 계단에 오를 때마다 그 높이만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삼층석탑의 상단이 보이고, 금당 터가 차츰차츰 빗장을 연다. 금당 터는 내벽과 외벽의 주춧돌이 있고, 그 가운데 불상의 좌대가 있다. 불상이 절 한가운데 자리 잡은 구조다. 삼층석탑의 높이를 감안하면 2층 규모로 보인다.

폐사지를 돌아본 뒤에는 흥원창으로 가보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옛 조창 자리다. 강과 산을 물들이는 일몰이 아름답다.

충남 보령 성주산 자락에 둥지를 튼 옛 절터 성주사지는 낭혜화상탑비 등 국보 1점과 보물 3점 등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물을 품고 있다.
충남 보령 성주산 자락에 둥지를 튼 옛 절터 성주사지는 낭혜화상탑비 등 국보 1점과 보물 3점 등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물을 품고 있다.

■절터에서 느끼는 온기 보령 성주사지

충남 보령 성주사지는 크고 유서 깊은 절터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 생채기 난 돌탑 위로 훈풍이 스친다. 성주산 자락에 둥지 틀 듯 자리한 폐사지에는 지난한 세월이 담겨 있다. 사적 307호 성주사지에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흔적이 골고루 묻어난다. 국보 1점과 보물 3점을 비롯해 땅 안팎의 귀한 유물이 허물어진 절터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거친 돌덩이로 에워싼 절터의 외형만 봐도 번창했을 당시 규모가 짐작된다.

성주사의 과거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은 본래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사찰은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낭혜화상)가 다시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유행한 선종은 불경을 깊이 알지 못해도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교 종파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선종의 큰절이 전국에 9개 세워졌는데(구산선문), 그중 성주산문의 중심지가 성주사다. 성주산문은 구산선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승려를 배출했다. 성주사 일대에 승려 수천 명이 머물 때는 아침이면 사찰 앞 성주천이 쌀 씻은 물로 하얗게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혀 있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돼 있다.

성주사지를 에워싼 성주산은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깊은 숲과 계곡이 있다.
인근 성주산자연휴양림, 개화예술공원, 보령석탄박물관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junglee@fnnews.com 이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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