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최순실 사태에 뒤숭숭한 공직사회 “밤새 만든 정책보고서인데 빨간줄 치며 고쳤다니…” 허탈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1.01 17:44

수정 2016.11.01 17:44

무엇을 위해 열심히 일했나 공무원 자부심 빼앗긴 느낌..자괴감 팽배 침통한 분위기
의료법개정안 노동개혁안 등 최순실 쓰나미에 모두 묻혀
행정공백 우려감이 현실로 복지부동 심화될까 우려감
조선·해운 경쟁력 강화 방안, 맹탕에 그치며 비판도 거세..국가신용도까지 악화 분석
최순실 사태에 뒤숭숭한 공직사회 “밤새 만든 정책보고서인데 빨간줄 치며 고쳤다니…” 허탈


"공무원이 가진 게 뭐가 있나.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 하나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행정부의 수장이 비선실세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나쁜 사람'이라 칭하고 잘라낸 것 아닌가. 이번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은 공무원이 어디 있겠나."

얼마 전 모 부처의 차관 자리에서 물러난 한 전직 공무원은 이번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관가가 집단 무기력증에 빠졌다.

"밤새 만들어 올린 정책보고서를 자격도 권한도 없는 '비선실세'라고 하는 자가 빨간 줄을 쳐가면서 좌지우지했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나 싶다"는 기획재정부 일선 과장의 토로는 관가의 침통한 분위기를 대변한다.

또 "새 내각이 구성된다고 해도 내년 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면 바뀌게 되는 만큼 정책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력을 상실했다는 말도 나온다.

공무원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행정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서울청사의 한 공무원은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고, 선거 결과에 대한 광범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데 국내 정치 문제로 정부와 정치권이 분주하다 보니 한반도정세에 미치는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전날 정부가 발표한 '조선.해운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 결국 '맹탕'으로 그치면서 현 경제팀이 구조조정에 따른 책임을 다음 정부로 넘기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유일호 부총리는 전날 "11조원 규모의 군함.경비정 등 공공선박을 발주하는 등 2020년까지 약 25조원을 조선.해운업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독자생존이 어려운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선 사실상 '연명치료'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고통이 수반되는 수술을 포기한 채 연명의 시간만 허용하는 대증요법을 선택한 것"이라며 "지난 정부에서 미루는 바람에 곪아버렸다고 비판했던 현 정부가 사실상 구조조정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비단 산업 구조조정뿐 아니다. 당장 보건복지부는 11월 중 원격의료 도입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이 이번 사태로 발목을 잡혔다. 또 전날까지 의견수렴을 종료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안 역시 오는 30일 이전까지 종료해야 하지만 기약할 수 없다.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문제 또한 이번 사태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은 오는 12월까지 시민단체가 포함한 협의체를 구성해 논의해 나가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협의체 구성 논의조차 없다. 현 상황을 감안하면 당분간 협의체 구성도 어려울 전망이다.

현 정부가 밀어붙였던 노동개혁 4대 법안 역시 오는 21일부터 법안 심의가 본격 진행되지만 연내 처리가 불투명하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지방노동청장을 비롯한 전 간부를 소집, 노동개혁 4개 법안 심의에 대비하라는 뜻을 전달했지만 여당마저 '최순실 게이트' 수습에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최순실 사태는 유.무형의 국가신용도까지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기업의 '오너리스크'와 이번 대통령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사태가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실제 해외지사에서 근무하는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대외이미지와 신뢰도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탓에 경제부처 스스로 비상시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외적 노력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정부는 국제신용평가사 등에 e메일을 보내 한국 경제정책은 흔들림이 없다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고 설명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대한민국 전체가 뒤숭숭한 가운데 현재 우리 경제는 소비, 투자, 수출 등 주요 경제지표에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9월 산업생산은 지난 4월 이후 5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소비는 5년7개월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10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3%로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 10월 국내 수출실적은 419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2% 감소했다. 9월에 이어 또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같은 기간 수입 역시 348억달러로 5.4% 감소했다. 4.4분기에도 미국 금리인상, 기아차 파업 등 대기하고 있는 악재 탓에 반등이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전직 고위관료 출신은 "최순실 게이트로 국가 리더십의 커다란 공백상태가 생기게 되고, 민심수습책으로 개각 등이 검토되고 있어 모든 공무원이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는 것 같다"면서 "국내외적으로 경제가 어렵고 변수가 많은데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은 더욱 심해질 것 같다"고 진단했다.

fact0514@fnnews.com 김용훈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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